2024/4/19

 

 

“편하게 해. 나는 복잡한 의전 따위는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 신경 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에게는 불편함이 가지 않는 것 말야. 그래도 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치인이네. 그래서 더더욱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하는 건지 모를 정도의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

(...)

지시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사전에 검토해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돋보이고, 인간으로서는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였다. 단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더 많은 관심과 긴장이 요구됐다.(64-65p)

 

 

제가 소대장을 할 때 저의 소대원이 같은 소대 부소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피해 사실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소대원은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병이었는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며 부소대장이 아침 GOP 작전 철수 중에 이병의 얼굴을 구타했습니다. 부대 복귀 후 입가에 피가 묻은 소대원을 보고 여러 차례 물었는데도 소대원은 한참 스스로 넘어진 거라고 진술하다가 결국에는 부소대장에게 맞았다고 제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후 부소대장이 상급부대 보고를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하였을 때도 저는 헌병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여 수사를 받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과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힘의 불균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제가 지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보다는 격리 조치부터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197p)

 

 

 

ㅡ 문상철, <몰락의 시간> 中,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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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4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116p)

 

 

 

ㅡ 안온, <일인칭 가난>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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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

 

 

영화에서 사이보그는 머리에 전극을 꽂고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뇌의 데이터가 컴퓨터로 바로 옮겨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메모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을 뇌로 전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작은 전자칩을 팔에 이식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칩은 건물 출입 카드나 버스 승차권을 대체하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고 있다. 전자 칩은,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뇌의 명령을 받아 작동되지 않는다.

(...)

몸에 전자 칩을 이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라고 부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우리 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로 인간 행위자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기계를 바꾸고, 기계는 우리를 바꾼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는 전례 없이 기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기계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화되었으며, 사이보그는 우리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계가 우리 몸에 삽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74-75p)

 

 

섀넌이 선택한 필진 대부분은 섀넌과 친한 사이버네틱스 그룹 회원들이었다. 심리학, 생리학을 연구했던 사이버네틱스 그룹은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뇌와 비슷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들이 염두에 둔 ‘생각하는 기계’는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매카시는 처음부터 이런 접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봤으며, 또한 ‘생각하는 기계’는 꼭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제만 풀면 된다고 추론했다. 생물학적 혹은 구조적 유사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기능만 같으면 됐던 것이다. 비행기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지 않아도 날 수 있듯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실 새처럼 날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듯이, 매카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오토마타에 관한 책이 출판될 무렵 그는 ‘사이버네틱스’나 ‘오토마타’와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매카시는 이 단어를 어디에선가 보고 자신이 사용했다고 회고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매카시 이전에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94-95p)

 

 

미국에는 이렇게 MIT, 스탠퍼드, 카네기 멜런 세 곳의 대학에 센터가 설립되어 인공지능 연구를 이끌었고,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 설립된 인공지능 연구소가 이 연결망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들은 모두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접근 방법을 ‘기호 인공지능’이라고 불렀다.(99p)

 

 

왜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이에 답해서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 역할을 흉내 내는 임무를 맡기고 이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게 했을까?

튜링의 논물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이 성 역할 놀이를 기계의 지능을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비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튜링 테스트가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튜링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논문에서 향후 50년 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고’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이 테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튜링이 성 역할 놀이를 테스트에 도입한 이유에 대해 그가 인간-기계의 경계가 임의적이라는 것 외에 남녀의 사회적 성별의 경계 또한(심지어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까지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심판관의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튜링이 사고와 욕망의 경계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제노바는 튜링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검사하는 테스트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받아들였던 이분법적 사고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심원한 문제의식은 튜링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면서 성 역할의 경계와 같은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119-120p)

 

 

2차 사이버네틱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성 체계이며,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 생명체도, 까마귀도, 개구리도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복잡한 한 자기 생성 체계가 외부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용이었다.

그에 따른 과학적 지식에 객관적이고 절대적 지식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관주의가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세상을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행동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는 진리라는 개념 없이도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166-167p)

 

 

 

ㅡ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中,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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