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4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116p)

 

 

 

ㅡ 안온, <일인칭 가난>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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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

 

 

영화에서 사이보그는 머리에 전극을 꽂고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뇌의 데이터가 컴퓨터로 바로 옮겨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메모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을 뇌로 전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작은 전자칩을 팔에 이식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칩은 건물 출입 카드나 버스 승차권을 대체하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고 있다. 전자 칩은,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뇌의 명령을 받아 작동되지 않는다.

(...)

몸에 전자 칩을 이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라고 부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우리 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로 인간 행위자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기계를 바꾸고, 기계는 우리를 바꾼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는 전례 없이 기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기계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화되었으며, 사이보그는 우리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계가 우리 몸에 삽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74-75p)

 

 

섀넌이 선택한 필진 대부분은 섀넌과 친한 사이버네틱스 그룹 회원들이었다. 심리학, 생리학을 연구했던 사이버네틱스 그룹은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뇌와 비슷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들이 염두에 둔 ‘생각하는 기계’는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매카시는 처음부터 이런 접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봤으며, 또한 ‘생각하는 기계’는 꼭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제만 풀면 된다고 추론했다. 생물학적 혹은 구조적 유사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기능만 같으면 됐던 것이다. 비행기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지 않아도 날 수 있듯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실 새처럼 날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듯이, 매카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오토마타에 관한 책이 출판될 무렵 그는 ‘사이버네틱스’나 ‘오토마타’와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매카시는 이 단어를 어디에선가 보고 자신이 사용했다고 회고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매카시 이전에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94-95p)

 

 

미국에는 이렇게 MIT, 스탠퍼드, 카네기 멜런 세 곳의 대학에 센터가 설립되어 인공지능 연구를 이끌었고,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 설립된 인공지능 연구소가 이 연결망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들은 모두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접근 방법을 ‘기호 인공지능’이라고 불렀다.(99p)

 

 

왜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이에 답해서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 역할을 흉내 내는 임무를 맡기고 이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게 했을까?

튜링의 논물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이 성 역할 놀이를 기계의 지능을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비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튜링 테스트가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튜링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논문에서 향후 50년 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고’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이 테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튜링이 성 역할 놀이를 테스트에 도입한 이유에 대해 그가 인간-기계의 경계가 임의적이라는 것 외에 남녀의 사회적 성별의 경계 또한(심지어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까지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심판관의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튜링이 사고와 욕망의 경계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제노바는 튜링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검사하는 테스트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받아들였던 이분법적 사고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심원한 문제의식은 튜링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면서 성 역할의 경계와 같은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119-120p)

 

 

2차 사이버네틱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성 체계이며,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 생명체도, 까마귀도, 개구리도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복잡한 한 자기 생성 체계가 외부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용이었다.

그에 따른 과학적 지식에 객관적이고 절대적 지식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관주의가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세상을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행동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는 진리라는 개념 없이도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166-167p)

 

 

 

ㅡ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中,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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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7

 

 

 

내 트위터는 끔찍했다. 물론 트위터 전반이 끔찍하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14년 후반부에 누군가 트위터에 있는 모든 걸 끔찍하게 만드는 버그를 풀어버린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트위터 덕분에 많이 웃었는데’하고 한탄했다. 더 이상 트위터로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트위터에는 웃기고 흥미로운 트윗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지루하고 끔찍한 헛소리밖에 없었다.

(...)

예민하고도 뚱했던 10대 시절 내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트위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트위터가 특별하고 또 선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다. 트위터는 기생충 같은 떠버리들로 바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해체하고 불평하고 화내고...(24-25p)

 

 

삶은 현재형 시제로 살면서 미래를 곁눈질하는 동시에 과거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음에도 일인칭 시점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문학과 삶의 핵심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가 평소 자신의 고뇌 어린 일인칭 시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인칭 의식에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삶의 일인칭 시선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의심과 결단을 반복하는 실질적 일인칭 의식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라는 다른 일인칭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만약 삶에서의 일인칭 시점을 특징짓는 요소가 고뇌이며 그것이 일인칭 소설을 읽을 때 제거되고 만다면,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문학에서 일인칭이란 근본적으로는 삼인칭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소설의 두 버전은 서로 같다고 말이다.(103p)

 

 

나는 늘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나란히 진행하거나, 혹은 그 둘이 우연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불가해한 경험을 한 뒤 최선을 다해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 경험을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듯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가 결코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총체적으로 행동하는데ㅡ그중 오직 일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이다ㅡ, 이때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했다.(108p)

 

 

 

ㅡ 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中, 어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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