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6

 

 

근자에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좋았다. 기대를 많이 한 작품집이라 읽기 전에 조금 걱정을 했으나 예상을 웃돌 정도로 좋았다. 실린 작품이 골고루 좋았지만 최은영의 매력은 단편보다는 중편정도의 분량에서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편은 또 어떨까?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76p)

 

 

학위를 받았지만 윤희는 어느 때보다도 허전했다. 무언가를 이룬 게 아니라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조차 그 순간을 즐기지도, 자신을 격려하지도 못하는 자기 모습이 익숙하고 한심했다. 그렇다고 이런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85p)

 

 

언제나 주희였다. 싸우고 나서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던 사람은. 쪽지로, 핸드폰 문자로, 지나가는 윤희의 팔을 붙잡고 멋쩍게 웃었던 사람은.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94p)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집에서 자라고 했는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다시 이러면 진짜 혼낸다.” 다그치다가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볼을 비비대던 엄마,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99p)

 

 

내 눈에 모래는 의사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똑똑한 동생을 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의 가장 넓은 평수에 사는 온실 속 화초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용돈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모래가 조금이라도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애를 속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118p)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126-127p)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걸 믿지 못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은 못했을 거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1학년 말, 전공 선택을 하면서 공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궁금하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다면서. 타고난 부분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같은 일을 경험하더라도 해석하고 반응하고 회복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나는 공무가 인간에게 품는 낙관이 신기했고, 때로는 그런 말들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의심했다. 네가 어떻게 커왔는지 뻔히 아는데,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가해자들도 변할 수 있어? 달라질 수 있어? 그 인간들이 변하고 달라진다고 해서 그들이 학대한 사람들의 상처가 없어져?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무의 말에 순간이나마 마음을 걸치고 싶었다. 타고난 것은 변하지 않지만 같은 일을 겪어도 극복할 힘이 길러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에.(136p)

 

 

마음을 말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난 그게 그렇게 어렵더라. 누군가 내 마음을 받아써줄 순 없겠지. 너도 공무도 이런 내가 답답했을 거야. 어쩌면 의뭉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냥 그런 재주가 없었어.(140p)

 

 

단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외로워지기 싫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서 진짜 마음 하나 없이 함께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게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이었는데.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까.(141p)

 

 

내가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와 말하지 않고도 오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빨리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157p)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162-163p)

 

 

그날 밤, 나는 내가 평생을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며 살았다는 걸 알아차렸어. 그리고 그 책망의 무게만큼 그 사람들에게 의존했다는 것도.(178p)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180-181p)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

미주는 그 사건으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었다. 진희가 자길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진희를 버렸다는 사실을 미주는 그제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후회로 울어 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 자신의 눈물이 미주는 역겨웠다.(202p)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208p)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사람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222p)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그 룰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꽃이 필 때 웃고 비둘기가 마술사의 손등에 앉아 있을 때 감탄할 일이었다.(223-224p)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어른들은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조용히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225p)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235p)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투명하게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의 일이 얼마나 될까. 나는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그녀의 곁에 같이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하민, 하민, 하고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 침묵이 내게는, 그녀의 고통과 무관한 내게는 더 합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서.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273-274p)

 

 

처음엔 친구들과 나눠 피우던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방에서 혼자 피웠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을 것들을 잔뜩 쌓아놓고 먹으면서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비루한 현실은 그 나른한 피로 속에서 엷게 빛났고 폭발하는 웃음은 내게 위안을 줬다. 그러나 공허했다. 잠에서 깨어나 먹다 남은 음식들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취한 눈에 빛나 보이던 것들은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색이 바랜 것처럼 느껴졌다.(277-278p)

 

 

그 말이 기억날 때면 엉망이 된 사람 하나가 보였다. 이 사람한테는 이런 말투로 말하고, 저 사람한테는 저런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 하나가. 한없이 상냥하다가 누군가에게는 비정할 정도로 무심하고, 진심도 아닌데 그런 것처럼 말하고 웃다가도 돌아서면 웃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그렇게 하루를 살고 보면 자신의 진짜 말투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게 된 사람이. 길거리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그 이상한 사람을 보고 웃는 것만 같았다. 자주 추웠다.(280p)

 

 

그때도 나는 하민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대학원에 들어갔는지 알았으니 라페스트에 찾아가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요르카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될 무렵 나는 브라질로 돌아왔다. 그때도 여전히 시간만 잡으면 아일랜드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팔 년 동안, 나는 아일랜드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출국장을 나서면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했던 건 착각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아일랜드는 내 마음속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려 현실의 선택지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이후 나의 삶은 전과는 다른 속도와 리듬을 얻었으니까. 나는 엄마의 집에서 독립했고 대학에 재입학했으며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직장을 구했다.(299p)

 

 

자신이 느끼는 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을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 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이것에 대해 알고 나면 왜 인물들이 쉽게 눈물을 흘리는 대신, 끝내 울음을 참아내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눈물도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날 선 경계가 여기에 있다.(318-319p)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나, 때때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나.(324p)

 

 

 

ㅡ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中, 문학동네

2018/10/10

 

 

인간이란 구르는 걸 멈추지 않는 한 조금씩 실이 풀려나갈 수밖에 없는 실타래 같은 게 아닐까, 그때 고모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물,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어느날은 거울 속 늙고 병든 여자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리라.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을 준비하는 것이다.(82-83p)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종강 즈음이면 한 학기를 정리하며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늘 확신에 차 있었고 그 말의 무게를 책임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생으로서의 마지막 말은 존재와 신념을 부인하는 배교자의 언어였다.(124-125p)

 

 

얼마 전 독일을 충격에 빠뜨린 이민자와 난민의 집단 성범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난주 토요일엔 이 작은 도시에도 그들의 유입과 정착을 반대하는 거리행진이 있었습니다. 행진은 평화로웠지만 행진 뒤에 남은 극우단체 소속 회원들은 자동차의 유리를 깨거나 거리의 소화전을 부수었습니다.

(...)

상상 속에서 부풀려진 공포와 잠재된 폭력을 분출할 수 있는 도화선이 간절한 사람들이 거리를 지배하던 날이었으니까요.(133-134p)

 

 

상처는 영혼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강박적인 성실함으로 영혼을 좀먹는다. 상처를 이겨내면서 성숙해졌다는 말은 균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진저리나도록 아름다운 언어·····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 맞고 있을 땐 저만치서 가만히 서 있는 아이들을 죽도록 미워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맞는 아이와 무관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구경하는 무리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날들은 절대로 망각되지 않았다. 폭력은 차츰차츰 번져 아이들 사이에서도 빈번해졌다. 덜 맞고 더 먹기 위해 서로를 때리고 비방하고 추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시기하고 배반하고 원망하고 괴롭혔다. 잊었을 텐데, 형기를 마쳤을 원장과 교사들, 시설 관리인과 급식을 담당했던 식당 직원들, 비정상적으로 비쩍 마른 아이가 절뚝이며 지나가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 보육원 주변의 농가 주민들, 모두들 이미 잊어버리고 잘 살고 있을 텐데, 어째서 나는 높은 탑처럼 쌓인 기억의 더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가. 이토록 끈질긴 고통, 일생이 다 지나도 작은 균열 하나 나지 않을 견고한 결정체, 그리고······

그리고, 그들이 있었다.(239-240p)

 

 

ㅡ 조해진, <빛의 호위> 中, 창비

2018/10/5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경제적 지원에 종속되지 말고 독립적으로 작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라도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직업과 함께 문학이라는 예술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로 들린다. 내게는 이 말이 창작이라는 예술 행위를 거의 취미의 형태로만 즐기라고 들려서 약간 자조적으로 들렸다.

 

 

 

쉽게 말해 한국 문학계는 하체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허약하기 그지없는데, 머리만 비대하게 커서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같은 뻐꾸기만 날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가끔 하체에도 영양분을 공급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수입이 있을 때만 그러합니다. 그러면서 한국문학을 사랑한다는 애정표현은 잊지 않는데, 엄밀히 말해 그것은 밥그릇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35p)

 

 

개별 비평은 예외 없이 그들이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위치)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호의적인 비평만 하는 비평가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격이 온화하고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비평밖에 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것을 구조적 결과라기보다는 자발적 선택으로 착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해심이 많은 표정을 짓다가도 자신을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정제되지 않은 적대감을 드러내고 야유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47p)

 

 

이는 물론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이는 정년퇴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교수로 생명연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제자(후배)를 위해서 깨끗이 물러나야 할 텐데, 하나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인생을 살 만큼 산 학자의 배려심이라는 것이 30대에 은퇴를 결심하는 스포츠선수들(“후배들에게 출전기회를 주기 위해서······ 운운”)보다 작다는 것은 그들이 평생 닦았다는 학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문학 따위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101p)

 

 

전형적인 시민계급 출신 증권 중개인이었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처자식을 팽개치고 무일푼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친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와 간통을 한 후 그녀를 냉대함으로써 결국 자살(음독을 했는데 바로 죽지 않고 며칠 간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죽습니다)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만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철면피 같은 행동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소위 예술가의 특권이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시민이 누리는 일상적 행복을 포기함으로써 획득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은 그저 시민적 도덕의식이 결여된 망나니에 불과합니다.(156p)

 

과연 그런가.

이 글을 읽고 재차 생각해봐도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치는 여전히 그저 시민적 도덕의식이 결여된 망나니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아주 훌륭한 예술작품이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오직 이 위대한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있는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이해를 못한다면, 이를 설명하고 이해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 그러한 지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작품을 설명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중은 훌륭한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 설명은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같은 작품을 몇 번이고 읽고 보고 듣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심지어 나쁜 것도 익숙하게 만들 수 있다. 마치 썩은 음식이나 보드카나 담배, 아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사람들을 나쁜 예술에 익숙하게도 만들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대중은 최고의 예술작품을 평가할 만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투로 말해서도 안 된다. 대중은 우리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언제나 이해해 왔으며, 현재도 이해하고 있다.(189-190p)

 

과연 그런가.

모든 것을 익숙하게 만들 수는 없다. 게다가 대중 일반이 최고의 예술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갖고 있다고도 믿을 수 없다.

 

 

 

ㅡ 조영일, <직업으로서의 문학> 中, 도서출판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