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

 

 

1/3 정도는 인터넷에서 읽었던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읽는 글이었다. 칼럼의 특성상 호흡이 짧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편했다. 저자가 영화와 만화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서 그걸 다루는 글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23p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22-23p)

 

 

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40p)

 

 

(...)

나는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서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여, 논문 심사라는 부실한 역할극을 완성했다.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131p)

 

 

선거가 끝났다는 것은, 자신의 당선이야말로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당분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면이 있다면, 그 모든 허황된 약속의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가고자 한 결단에 있다.(187p)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을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이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189p)

 

 

그 고약한 신과 피조물 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더 행복한 존재 대 덜 행복한 존재 간이 아닌, 더 도덕적인 존재 대 덜 도덕적인 존재 간이 아닌, 더 아름다운 존재 대 덜 아름다운 존재 간이 아닌, 똑똑한 존재 대 바보 간의 위계질서다. 이 고약한 신은 세상의 미만한 사랑과 도덕이 모두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진열장 안의 피조물들보다 똑똑하다. 하지만 그러한 지력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실연 끝에 오는 허망한 지력과도 같은 것이다. 실연 끝에 오는 연애에 대한 통찰이 그다음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이, 불행히도 그러한 지력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많지 않다.(271p)

 

 

대상에 대한 모든 정서적 집착과 매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것은 아마도 부처이거나 기계일 것이다.

(...)

하지만 기계로서 사는 인생에 대가로 다가오는 것은 엄청난 권태다. 오랜 결혼생활에 이른 부부가 더 이상 상대의 육체에 매혹되지 않을 때처럼. 그 부부는 상대의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지 모르나, 그들의 인생이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냉정한 지식은 지식 소유자의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주고, 대상의 마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하지만, 그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즉 한니발의 지식은 한니발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짓밟히지 않고 유유히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285-286p)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한니발은 그러한 순간을 망가뜨리는 무례한놈들을 싫어하며, 그들을 먹어치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292p)

 

 

(...) 그는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 계산하고 잘못 측정하고 잘못 수행했다는 점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현실 자체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그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그 자신이란 과연 통합된 주체인지, 나는 나인지, 세계는 세계인지······. 많은 것이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그 깨달은 자를 한층 더 좌절케 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그는 햄릿처럼니체와 해럴드 블룸의 해석을 따르면(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인식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295-296p)

 

 

민정: 사람들이 쓰신 글을 좋아해주니까 솔직히 좀 좋지 않으세요?

영민: 좋긴 한데 그렇다고 춤을 추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306p)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한 근거나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340p)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어크로스

2018/11/23

 

 

과학에서의 중요한 계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과학에서는 답을 주는 것뿐 아니라 그 답의 부족한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죠.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면 굉장히 새로운 질문을 끄집어내고 난해한 문제를 점차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답을 찾기 전에 답을 찾는 데 필요한 틀을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83p)

 

 

마지막으로 확률에 대한 수수께끼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이겁니다. 지능이 굉장히 높은 여자들은 대부분 자기보다 지능이 낮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요. 통계적으로 그렇다고 합니다. 왜 그럴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서 보통은 별의별 답이 다 나옵니다. 가령 여자가 원래 남자보다 지능이 높다라든지, ‘똑똑한 남자는 똑똑한 여자를 싫어한다라든지. 진짜 이유는 뭘까요?

정답은 바로 확률적으로 대부분 남자들이 지능이 굉장히 높은 여자보다 멍청하니까입니다. 제가 앞에서 지능이 굉장히 높다고 했을 때는, 확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보다 지능이 낮다는 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능이 굉장히 높은 사람은 웬만해서 자기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뭔가 사회적인 편견에 입각해서 답을 찾게 되지요.(138-139p)

 

 

사람들은 아마 과학 혹은 확률론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답을 할 겁니다. 사람이 그 도구를 가지고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도 할 수 있지, 그것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이죠.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확률론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선하고 악한 것도 확률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엇이 묘사한 베켓 대주교의 주장처럼 우리가 선하다고 결정한 것도 악한 결과를 가지고 올 확률이 있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약간의 선한 효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것들도 확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40-141p)

 

 

수학적인 사고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질문에 답할 때, 수라는 개념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굉장히 제한적인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건전한 과학적 시각이란 근사approximation'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기보다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중에 뒤집어지더라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이해해나가는 것이죠. 애로의 경우도, 뉴턴의 경우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근사해가는 과정, 항상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학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179p)

 

 

 

김민형,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플루엔셜

2018/12/1

 

 

쇼코는 할아버지에게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 같았다. 달리기경주에서 일등을 했다. 고모와 맛있는 카레집을 찾아갔다, 휴일에 친구들과 보트놀이를 했다. 북해도를 여행했다.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쇼코의 이야기는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반면 내가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이야기뿐이었다.

할아버지의 돈을 훔쳤지만 할아버지는 모른 척했다. 그 돈을 하수구에 버려버렸다. 가끔씩 할아버지의 음식에 독을 타고 싶다, 아빠가 보내는 양육비를 고모가 허비해버리는 걸 알고 고모의 속옷을 하나둘씩 찢어서 거리에 내던졌다, 가끔씩 소독한 칼로 자신의 골반 근처를 찌른다.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두 진실된 이야기였을 거라는 걸.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더라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고, 내 편지에 썼듯이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16-17p)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24p)

 

 

그래. 나는 겁쟁이야. 하지만 증오할수록 벗어날 수 없게 돼.(27p)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34-35p)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않았고, 되려 나이가 드니 감기도 잘 안 걸린다고 말했었다.(43p)

 

 

“난 정말이지 괜찮을 줄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도 벌릴 수가 없었다. 턱을 벌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마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말라가고, 피부가 누렇게 변해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 줄로만 알았다. 단지 그 노화가 조금 빠르게 진행된다고만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는 그리도 예민했으면서 할아버지의 상황에는 왜 그토록 무뎠었는지.

할아버지는 베레모를 벗어서 무릎에 올려놨다. 숱이 적은 흰 머리카락이 모자에 눌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치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처럼 변명했다.

“정말이다. 이렇게 심해질 걸 알았으면 너에게 진작 말했을 거다. 자주 얼굴이나 보자고.”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써서 웃고 있었다.

“내가 말했으면 나 자주 보러 왔을까.”

나는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머리를 꼭 안았다. 정수리에서 머릿기름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예순다섯 밤을 더 보내고 영면하셨다.(45-46p)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89-90p)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91-92p)

 

 

이모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엄마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104p)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105p)

 

 

이모와 엄마는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모는 최종 재판에 참석했었다고 말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주제를 돌려야 하는데 그 생각에 부딪히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면 엄마는 어색하게나마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결혼생활의 한심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친정 친구들과 절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이모를 찾아가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안양에 찾아갔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달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113-114p)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람들은 후자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115-116p)

 

 

할머니의 바람대로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가끔 엄마는 이모를 떠올렸다.

(...)

살면서 몇 번은 이모에게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실행한 적은 없었다. 시간을 이모를 한때 엄마의 삶에 머물렀다 스쳐간 사람으로 기록했고 엄마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120p)

 

 

한지도 한지의 이야기를 해줬다. 나이로비에 살고 있는 삼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이백오십만 명이 빈민가에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지는 그런 극단적인 부조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교회에 가서 가족의 평안만을 비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지는 그 교회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지는 아버지의 돈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누려왔던 삶은 부모님의 부로 인한 것이었고, 그 부가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건 결국 돈뿐이라고 고백했다.(144p)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164-165p)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193p)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미카엘라는 언제나 든든한 딸이었다. 고생해서 제힘으로 서울에 뿌리를 내린 딸이 여자는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학 번 보내지 못했고 비싼 메이커 교복 대신 시장 교복을 사다 입혔던 여자였다. 통장에 부어놓았던 돈으로 미카엘라의 대학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첫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온 아이가 이제부터 학비는 제 손으로 벌어 낼 테니 몸을 그만 혹사시키라고 했다.

그런 딸 앞에서 여자는 언제나 면목이 없었다. 엄마로서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짐이라도 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됐다.

(...)

여자는 걸음을 옮겨서 지하철을 탔다. 딸이 사는 망원동으로 가서 숙소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어쩌면 미카엘라가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할지도 모르고,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카엘라에게 먼저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광복절 날에도, 토요일에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아이가 아닌가. 바쁜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220-221p)

 

 

그녀 나이 서른하나, 그녀 또래의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무엇 하나 바꿔보지 못했다. 세상은 그녀가 온몸을 던져도 실금하나 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녀의 이십대를 통해 깨쳤다.(235p)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238-239p)

 

 

ㅡ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