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16

 

나머지 절반이 궁금합니다. 작가 양반.

 

 

 

나는 한번도 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정신이 박힌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만, 나는 내가 정말 싫다.

 

물론 내가 늘 싫은 건 아니다. 언젠가 사귄 친구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로 태어날래,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나요,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약간 기겁했지만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는데 자기 자신으로 태어난다니 미친 나르시시스트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테일러 스위프트로 태어나서 톰 히들스턴을 사귀고 한달 만에 차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난 왜 팝스타 따위로 태어나고 싶을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의 후생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건 부러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역겹다면 그래도 겪어본 역겨움이 더 나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생각이었지 자기애나 자신감, 자존감(윽!) 따위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기애가 왜 전혀 없겠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경상도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애지중지 키워졌다. 그러니 나도 모르는 사이 삶에 대한 낙관적 인식이나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심어졌는지도 모른다.(1회)

 

게다가 앤디 워홀이라니. 워홀을 좋아하는 건 취향의 측면에서 사망신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학을 하는데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한다거나 영화를 하는데 우디 앨런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속력으로 도망쳐야 해요,라고 말한 상민이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이 리스트는 끝이 없습니다. 마크 로스코, 무진기행, 이터널 선샤인, 에드워드 호퍼, 웨스 앤더슨, 테드 창, 김훈, 히가시노 게이고, 화양연화, 이우환, 쉼보르스카…… 도망쳐요! 나는 리스트의 공통점이 뭔지 알 수 없었고 대체 무슨 기준이냐고 상민에게 물었다. 이 리스트의 공통점은 이 리스트에 속한다는 거예요. 상민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은 갔다. 90년대였다면 타르코프스키나 키에슬롭스키, 윤대녕이나 무라카미 류가 리스트에 포함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은 상민의 리스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2회)

 

수연이 가끔 조카들의 사진을 찍어와 내게 자랑하면 나는 겨우 귀엽다는 말을 한마디 하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조카가 없고 앞으로 가질 일도 없고 애도 싫어서 조카를 보고 좋아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데다 그걸 남에게 자랑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데(자기 애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고 난 뒤 조카가 생기면 자신이 비난했던 사람과 동일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과 닮은 조그마한 존재가 생긴다는 건 뭔가 다른 기분이긴 한가보군, 그래도 나한테 조카 사진을 보여주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수연에게 조카 사진 좀 그만 보여줘,라고 얘기하고 말았고 나중에 사과를 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까 꾹 참고 계속 조카 사진 볼게, 사실 귀여워, 따위의 말을 한 것 같은데 수연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3회)

 

나는 서른 전까지 한번도 외국에 가지 못했고 영화와 책으로 모든 걸 접했다. 여행을 혐오했는데 정확히는 여행=경험=자아발견 따위의 개념을 혐오했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인간의 의식은 소통이 불가능한 자기생산적 체계다.” 외국에서 피부를 태우고 한국에 돌아와서 책을 내는 이들은 사기꾼이야. 내가 말했다.

이런 생각은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갈 여건이 안되는 처지에서 비롯된 자격지심에서 스스로를 지킬 개념적 방어막이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고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곽경택이 만든 영화가 <억수탕>이나 <친구>잖아, 홍상수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김기덕이 파리 거리에서 그림 그리고 돌아와서 만든 한남 영화를 봐, 정용진이나 정태영의 SNS를 보라고! 바스키아를 찬양하는 그들의 수준을! 그러니 유학 같은 건 다 의미 없는 거야.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고 몸 대신 정신을 다른 곳에 피신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곳은 벨에뽀끄와 러시아혁명, 누벨바그가 뒤섞인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인공 섬으로 상황주의자와 60년대 뉴욕 시인, 멕시코의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역사의 종언에 대해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곳이었다. 당시 내 목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증발된 진리와 의미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복원하는 거였는데, 이러한 목표가 상투적일 뿐 아니라 대동아전쟁 시기 교토학파가 근대의 초극을 들먹이며 지향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훗날 상민이 빌려준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

 

이 나라에서 작가로 먹고 살려면 김진명이나 이외수가 되거나 <엄마를 부탁해>를 써야 한다고! 내 기준에서 잘 쓰는 작가가 책으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룬 경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고, 눈뜨고 볼 수 없는 작품들만 팔렸다. 그러나 뭐가 잘 쓴다는 거지? 과거에는 확신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는 형편없고 <딕테>나 <죽음의 한 연구>는 걸작이야. 그러나 지금 내 눈에는 모두 형편없다. <7년의 밤>도 형편없지만 <어떤 작위의 세계>도 형편없어. 어차피 다 형편없으면 돈이라도 되는 게 낫지 않아? 그러나 돈이 되는 걸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돈이 되는 거든 영원불멸의 고전이든 쓰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어떤 작품이 문학사, 예술사, 사상사로 편입되고 고전이 되는 과정들을 볼수록 그것이 아카데미즘이나 권위주의, 정치적 욕망, 예술적 사제주의, 남성지식인 연대의 엘리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나의 십대와 이십대를 통째로 앗아간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예술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 구역질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뭔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과정이나 감정이, 우리를 규정한다고 믿는 감정이나 취향이 얼마나 왜곡되고 우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수록 무엇을 좋아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고 필요나 효과에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 결국 돈이야! 따위의 의미 없는 말만 반복하는 형국이었다.(4회)

 

70년대의 건물들이 지금보다 낫고 그건 일본의 건물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야, 되지도 않는 고유의 스타일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라는 이야기를 상민이 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의 말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고유의 스타일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망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다.(7회)

 

세상이 정말 좁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이 좁은 게 아니라 내가 속한 바닥이 좁은 거 같았다. 서울에는 많은 사람이 살지만 관심사, 직업, 소득수준 등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한 다리 건너면 다 마주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게 다 고만고만해. 더구나 요즘은 비슷한 이들끼리 SNS로 의식 수준을 공유하니까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고(9회)

 

 

 

ㅡ 정지돈, <은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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