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

 

 

1/3 정도는 인터넷에서 읽었던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읽는 글이었다. 칼럼의 특성상 호흡이 짧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편했다. 저자가 영화와 만화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서 그걸 다루는 글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23p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22-23p)

 

 

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40p)

 

 

(...)

나는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서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여, 논문 심사라는 부실한 역할극을 완성했다.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131p)

 

 

선거가 끝났다는 것은, 자신의 당선이야말로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당분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면이 있다면, 그 모든 허황된 약속의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가고자 한 결단에 있다.(187p)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을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이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189p)

 

 

그 고약한 신과 피조물 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더 행복한 존재 대 덜 행복한 존재 간이 아닌, 더 도덕적인 존재 대 덜 도덕적인 존재 간이 아닌, 더 아름다운 존재 대 덜 아름다운 존재 간이 아닌, 똑똑한 존재 대 바보 간의 위계질서다. 이 고약한 신은 세상의 미만한 사랑과 도덕이 모두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진열장 안의 피조물들보다 똑똑하다. 하지만 그러한 지력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실연 끝에 오는 허망한 지력과도 같은 것이다. 실연 끝에 오는 연애에 대한 통찰이 그다음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이, 불행히도 그러한 지력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많지 않다.(271p)

 

 

대상에 대한 모든 정서적 집착과 매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것은 아마도 부처이거나 기계일 것이다.

(...)

하지만 기계로서 사는 인생에 대가로 다가오는 것은 엄청난 권태다. 오랜 결혼생활에 이른 부부가 더 이상 상대의 육체에 매혹되지 않을 때처럼. 그 부부는 상대의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지 모르나, 그들의 인생이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냉정한 지식은 지식 소유자의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주고, 대상의 마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하지만, 그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즉 한니발의 지식은 한니발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짓밟히지 않고 유유히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285-286p)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한니발은 그러한 순간을 망가뜨리는 무례한놈들을 싫어하며, 그들을 먹어치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292p)

 

 

(...) 그는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 계산하고 잘못 측정하고 잘못 수행했다는 점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현실 자체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그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그 자신이란 과연 통합된 주체인지, 나는 나인지, 세계는 세계인지······. 많은 것이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그 깨달은 자를 한층 더 좌절케 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그는 햄릿처럼니체와 해럴드 블룸의 해석을 따르면(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인식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295-296p)

 

 

민정: 사람들이 쓰신 글을 좋아해주니까 솔직히 좀 좋지 않으세요?

영민: 좋긴 한데 그렇다고 춤을 추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306p)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한 근거나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340p)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어크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