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 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고 통제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늘어나는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현실과 달리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에는 여전히 가족주의와 그것의 강력한 작동방식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9p)

 

 

버릇을 가르치느라 때렸다는 주장은 나중에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까지 발전한 ‘의도적’학대를 위장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학대는 없다. 서현이의 경우도 한두 번의 체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를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26-27p)

 

 

상황에 따라 부모는 자녀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강한 것이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아이의 관점이 아닌 성인,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28-29p)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35p)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영화 속 맥락에선 마을 전체의 침묵, 방조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이지만 나는 이 말을 우리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부모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듯 부모 혼자 아이를 학대하지 않는다. 체벌을 쉽게 생각하고 용인하는 태도, 폭력에 관대한 정서, 공적 개입의 부재 등으로 인해 자잘한 구멍이 사방에서 생겨나고 결국 어디에선가는 아이가 맞아서 목숨을 잃는다. 그런 면에서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쯤으로 여기고 부모의 체벌에 관대한 한국 사회는 마을 전체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40-41p)

 

 

성인 간의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의도적인 해를 끼쳐도 된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아이도 한 개인으로서 자율적 존재이고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이를 법의 언어로 반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가정 내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족의 사생활 영역에 국가의 개입을 요청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정 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 가정폭력, 부부강간을 금지하듯 아이들에 대한 체벌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관심과 보호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고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가 어려우므로 성인과 동일하게 아이들도 신체의 온전성을 보존할 권리를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법에 문외한이지만 부모의 권리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정의를 독일의 법에서 보았다. 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독일기본법> 제6조 제2항은 “자녀의 보호와 교양은 자연적 권리이자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부과되는 의무이다. 그의 행사에 관하여는 국가 공동체가 감독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한국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친권이 지나치게 강한 나라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는 부모의 자유권이라기보다 자녀의 보호를 위해 부여되는 기본권으로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 대상이어야 한다. 비대한 국가를 선호해서가 아니다. 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다.(56-57p)

 

 

다만, 우려되는 점 하나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아이가 원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가정우선의 원칙, 그리고 양육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지원 확대에 대한 강조가 자칫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128p)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이다. 중앙입양원 통계에 따르면 2016년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사람은 총 16만 6,512명에 이르며, 이는 같은 기간 국내입양(7만 9,088명)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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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 세계에서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보낸 나라다.(133-134p)

 

 

이 장의 서두에서 소개한 현수, 은비, 김상필 씨의 공통점, 이들이 불행한 죽음으로 증언하는 한국 입양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입양절차와 제도 운영의 책임을 공적 기관, 즉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맡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면서 오랫동안 채택을 유보해 유엔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비판받던 항목이 있다. 바로 21조 (a) 항인데 이 조항은 책임 있는 공적 기관, 즉 정부가 입양을 결정하라는 것이다. 입양제도를 운영하면서 이 조항을 유보했던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뿐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를 해외로 보낸 나라인데도 여태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을 서명만 하고 비준하지 않았다.

2012년 개정 <입양특례법> 시행으로 입양의 마지막 단계에서 법원이 허가하는 제도를 갖춘 뒤 정부는 2017년 8월, 21조 (a) 항의 유보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입양절차의 시작이 민간기관들에 맡겨져 있는데, 마지막 단계의 법원 허가제만 갖고 입양이 공적으로 관리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소개한 현수와 은비의 죽음은 모두 법원 허가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입양절차가 공적으로 엄격하게 관리되지 못해 벌어졌던 일이다. 여전히 해외든 국내든 친생부모가 아이를 입양 보내겠다는 뜻을 밝히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전적으로 민간 입양기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138-139p)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의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 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 연관되어 왔다.(157-158p)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232p)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아동학대 행위자의 처벌을 위한 조사뿐 아니라 가족이 다시 복원될 수 있도록 돕는 가족 보존과 재결합 지원 서비스도 동시에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담원들은 학대 행위자 처벌과 가족 보존 지원이라는, 매우 상반된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늘 ‘가치의 갈등’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심각한 학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신고 접수 이후 아동학대로 판정한 사례의 경우에도 가족 보존을 위해 가급적 고소고발보다 서비스 제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학대 행위자의 재학대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도 고소고발 등 공권력 개입 요청보다 사례 개입 서비스 제공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반면 이와 반대로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시행 이후로는 신고 대응과 조사의 부담이 커져 가족 보전을 위한 서비스 제공이 위축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친권에 개입해야 하는 신고조사의 영역은 공공기관이 맡고, 아동보호전문기관들은 가족보전과 치료, 재결합 위한 전문적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체계를 이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이가 부모의 돌봄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가정위탁, 시설 입소, 입양 등의 여러 대안적 양육방식 중에서 어떤 방식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지를 공적 권력이 결정해야 한다. 최후의 수단으로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다는 판단이 선다면 입양의 절차를 시작할 때부터 공공기관이 이를 맡아야 한다.(250-251p)

 

 

차별과 배제 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이 공감능력의 향상이다.

하지만 공감을 실천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공감은 편협하다. 혈연, 인종, 국적, 유사성, 가치의 공유 등으로 금을 그은 집단의 경계, ‘내 편’의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은 사람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그들’과 ‘우리’를 나누고 신속하게 ‘그들’을 차별할 표지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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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

핑커는 공감은 이타성을 촉진할 수 있고,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관점을 취하면 그 계층에게 공감이 확대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의 문명’을 추구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족벌주의처럼 감정이입과 공정성이 상충되는 예도 많기 때문이다. 핑커가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낫다고 추천한 이상은 다음과 같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배타적 가족주의의 폐해 극복과 관련해서도 나는 핑커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정책과 규범이라야 한다. 그것이 제2의 본성이 되어 감정이입에 굳이 호소하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 감정이입의 확대보다 권리의 범위 확대가 더 중요하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253-256p)

 

 

ㅡ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中,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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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4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 복잡해진다. 신파극인지 알면서도 눈물이 나고 눈을 꼬집히면 눈물이 나기 마련인 것처럼, 별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유독 엄마에 대한 글이나 영상을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친다. 한국에서, 아니 나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개인적으로 이 책은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 개인이 자신의 여행기를 책이라는 출판물의 형태로 남겼다는 개인적인 보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내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와의 여행기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게 이 책은 목적지인 인도도 중요하지 않고, 이모는 물론이거니와 무얼 했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방점은 ‘엄마’와 자식이 함께 무언가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유달리 엄마와 딸의 관계를 잘 다룬다거나, 생애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엄마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특장점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책은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서점의 매대에 꽂혀 있는 여행 에세이 중 이와 같은 테마의 여행기가 수십 권은 있을 것이다. 다만 여행 에세이를 즐겨 읽지 않는 나는, 이런 책을 처음 읽었고 그게 나름의 신선한 경험이었다는 말이다. 같은 테마의 다른 여행기를 읽었어도 아마 비슷한 감상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 여행에세이에 비해 큰 차별점이나 특정 집단에 소구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도에 대한 책이므로 인도에 대한 얘기도 잠깐 해보자. 인도에 처음으로 호기심과 관심이 생겼던 계기는 고등학생 때 읽었던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 때문이었다. 이 책의 본문에서도 류시화의 인도에 대한 또 다른 에세이인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얘기하며 저자의 인도에 대한 첫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정말로 그럴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들이 특별한 어느 누군가의 개인적 경험으로 남기에는 너무 많이 팔렸다. 예전 같지는 않아도 위의 두 책은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고 당시에도 이미 충분히 팔리며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그런 이유로 해외여행에 로망이 있는 사람치고 당시에 소위 ‘인도 뽕’을 맞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그때 그 책에서 접했던 인도는 그야말로 신비한 곳이고 살면서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길에서 동냥하는 거지조차 인생의 삼라만상을 꿰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영성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했으니 고등학생이라면 혹할만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더 이상 류시화의 책을 읽지 않지만 그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오늘은 기차역에 대한 새로운 추억도 생겼다. 기차역 소음과 어우러진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 말이다.

“캘커타에서 참 많은 것을 봤어. 살면서 봤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본 것 같아.”(111p)

 

 

스물한 살, 대학 시험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밤이었다. 다른 집과 달리 우리 집에선 누구도 날 서울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 아마 부모님은 딸을 데려다주는 것보다 딸이 서울로 가기 위해 필요한 차비를 버는 일이 더 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캐리어’라는 것을 샀고, 그 가방에 옷 몇 벌과 필기도구, 기숙사에서 쓸 만한 것들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불 꺼진 방으로 엄마가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옆에 슬그머니 누워 내 손을 꼭 잡았다.

“선영아, 혼자 서울 보내서 미안하다.”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생생한 그 말.(227p)

 

 

“선영아, 난 항상 딸을 믿어. 서울 가서도 우리 딸이 당당하게 잘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제부터 딸은 이 집에 손님처럼 오게 될 끼다.”

“내가 왜 손님이야?”

“그냥. 이제 가면 니가 1년에 몇 번이나 집에 오겠나. 그러니깐 이제부턴 손님이지.”

나는 정말 엄마가 말한 대로 1년에 한두 번 집에 내려갔다. 자주 찾는 손님도 아닌, 드문드문 찾는 손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나서 3년 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전화도 없고 집에도 안 오던 나에게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선영아, 니 뭐하고 사나?”

“왜? 왜 전화했는데?”

“보고 싶어서.”

난 엄마의 그 말에 그날 당장 짐을 싸들고 집으로 내려갔고, 3년 만에 엄마를 봤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엄마는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젊고 건강한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228p)

 

 

 

ㅡ 윤선영, <세상에, 엄마와 인도 여행이라니!> 中, 북로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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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9

 

 

먼저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 이야기다. 플라톤이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나누어 놓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한에 있어서, 현실과 실재의 경계는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의 ‘나’는 욕망의 실현을 위한 가상일 수 있으며, 나는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라는 가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욕망은 유지될 수 없으며, 삶은 끝난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한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출발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욕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항상 착각하며 살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상태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욕망의 실현에서가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통해 그런 욕망의 목표를 만들어내며 그것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욕망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재가 욕망이 실현된 세계이고 현실이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세계라면, 실재는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는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으므로 현실은 이미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욕망의 실현이란 사실은 욕망의 재생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실현된 욕망이란 끊임없이 멀어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똑바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을 똑바로 볼 때 욕망의 대상, 곧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공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욕망은 중단되며 쾌락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삐딱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삐딱하게 봄으로써 실재는 현실과 구분되고 삐딱하게 볼 때에만 존재하는 그 왜상적 대상을 욕망하면서 우리는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실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과 구별되는 실재를 인지하며 현실과 실재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욕망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욕망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공허 그 자체로서의 실재가 우리의 현실에 침투해 들어오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19-21p)

 

 

그러나 새옹지마의 교훈은 그저 훈훈한 것만은 아니다. 변방에 살았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현실은 대개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다. 당시의 의료수준을 생각해 보건대 그 노인의 아들은 아마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삶의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삶이 지속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그러한 삶의 일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해서 견디기 힘들다는 데 있다.(49p)

 

 

하이데거가 말하는 일상인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잡담이나 소문의 소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고, 그 누군가의 삶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참을 만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 누군가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때그때 적당히 흥분하고 적당히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으로 ‘하면 된다’를 되뇌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당장의 고통만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희망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고비 너머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다고, 조금만 더 견디어 내면 나는 왜 사는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의 의미는 곧 분명해 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일상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수험생이 시험을 마쳤다고 해서, 군인이 제대를 했다고 해서, 취업준비생이 취직을 했다고 해서, 처녀 총각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중단되지 않는 한, 일상은 지속될 것이며, 그것은 여전히 참기 힘들 정도로 지리멸렬할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의미가 왜 말해질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은 그 의미의 최종적인 봉합을 계속해서 연장한다.(51-52p)

 

 

102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간 노철학자가 깨달은 건강 유지의 비법은 결국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다머의 가르침에 따라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무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게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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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내적인 척도에 맞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하는 데 두고 있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 데에서 찾고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런 삶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사회는 내적인 척도에 맞게 평온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불가피한 생존 욕구마저 부정하고 있는 너무 야박한 사회가 아닐까?(64-65p)

 

 

다윈의 진화론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그러한 변이의 선택과정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관점은 살아남았다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변이 가운데 어느 것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만들고 교양 있는 행동을 하며 나아가 성스럽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인간의 본질과는 무관한 일로서 우연적인 역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84-85p)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살기 바쁘고 경쟁에 지쳐있는데 머리나 식혀볼까 하고 손에 든 소설마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해서 ‘부자 아빠’가 되라고 외쳐댄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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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 상류층의 사상은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에서 취약점을 보인다. 아파테이아와 평점심은 이미 가진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충고이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통치자들과 소유주들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덕과 어떤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는 신비적인 종교가 그 대답을 제공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기독교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철학사를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진부하게 여겨지는 대목일 것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이다. 나의 주장을 어처구니없게 생각한 사람들은 속으로 “돈도 없으면서 헛소리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진정한 쾌락주의자란 모든 종류의 욕망을 던져버리고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덧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킨타이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지나가는 어투로 재산이 없는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106-108p)

 

 

여러 가지 논거가 동원이 되겠지만, 가장 고전적인 논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세상을 저주하던 내게 이 말씀은 참으로 세상을 부정할 힘을 주었던 생명의 말씀이었다. 나는 나의 정신적인 방황과 고통이 세상의 거짓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진리가 너무 많아서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지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은데 그 놈의 진리가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는 이런 와중에 내 말이 진짜 진리요 하고 나서는 놈들은 대개는 목소리만 큰 사기꾼이거나 주먹 센 깡패라는 것이다.(117-118p)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129p)

 

 

무억보다도 코스모폴리탄적인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밖에 이유는 그들이 정치의 헤게모니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페는 사회의 모든 질서가 필연적으로 헤게모니 질서이며, 그것을 통해서 권력관계가 구성 된다고 보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넘어선’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페가 코스모폴리탄적인 ‘망상’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다극화된 세계의 건설이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을 이용해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에 공헌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은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은 따라서 결코 종결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189p)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개별적인 몸들이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세상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양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얻어진다.(240p)

 

 

인간의 비극적인 삶이 종식되지 않는 한 기도는 지속될 것이다. 이 땅의 고난과 굴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잘못을 용서해주기를 우리는 계속해서 참회하며 빌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수록 완전한 신을 갖는다”는 포이어바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신음과 같은 기도를 뱉어내게 할 것이다.(269p)

 

 

 

ㅡ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中, 라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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