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7

 

soso.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59p)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79-80p)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다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120-121p)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에게 너희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어. 내가 네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듯이 너는 내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는 모습도 있을 거야. 이를테면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 낮은 웃음소리, 빠른 발걸음, 잠들기 전에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 모로 누워 조용히 자는 얼굴,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음······ 하고 한 박자 뜸을 들이는 버릇, 신 음식을 먹을 때 찡그리는 표정, 할말을 속으로 ㅅ삼킬 때의 얼굴, 뒷짐을 지는 버릇······(175p)

 

 

엄마에게 이모는 책임감이 강하고 엄격한 언니였고 아빠에게 이모는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데이케어 센터의 복지사는 이모가 평상시에는 조용하다가 한 번씩 화를 내는 충동적인 성격의 노인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평가와 판단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263-264p)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말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320p)

 

 

 

ㅡ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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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

 

제일 재밌어 보이는 ‘올림픽공원 산책지침’만 읽었다. 혹시나 타이밍이 맞으면 다른 작품도 읽어볼지도.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노스탤지어라고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아? 아니 너희 때는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배우려나. 지수야, 너는 실제로 희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잠깐이면 가능할지 몰라도 희망은 장기적 동력이 될 수 없어. 의외로 휘발성이 강한 감정이라고.”

인류사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은 고칠 수 없게 된 과거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에서 비롯됐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날씨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얘기였다.(54-55p)

 

 

선물도 못 주고받게 하면서 무슨 크리스마스야. 지수는 몇 번 불평한 터였다. 사실 지수는 에이와 반대였다. 상습적 불평쟁이였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지 않는 게 아니듯 불평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62p)

 

 

 

ㅡ 지동섭 외,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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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

 

평이한 문장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밀도가 높다면 높고 사유만 실어나르는 듯한 문장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런 방식을 이 책에서만 쓴 건 아니고 이미 전작들인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도 비슷했으므로 놀란 건 아니겠으나 이번 작품을 읽고는 마음이 아주 약간 식었다. 나는 반복을 계속 경험하는 것에 남들만큼 재미를 못 느낀다.

 

 

 

 

 

나는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길들이는지 잘 알았다. 안혜리의 가장 큰 매력은 넓고 깨끗한 집이나 외모 따위가 아니라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것과 희구하는 것을 각자의 저울에 올렬서 마술 같은 균형을 맞추는 재주였고, 그래서 그 애는 어떤 의미로든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김은아도, 나도, 윤서래도, 다른 애들도 안혜리에게서 자신의 갈망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게 사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뒤에도 흔적에 충성을 바쳤다.(32p)

 

 

평범한 아이들은 차별이 나쁘다는 말에 선뜻 동의했지만 그게 싫어하는 애의 약점이 되면 금방 물어뜯었다. 혹은 그 애가 물어뜯기는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려 공범이 되었다.(54p)

 

 

성적표의 숫자나 아양을 떠는 태도 따위로 학생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교육자일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을 갖추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고 했다. 요컨대 이 사람은 본질을 보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속물이 되는 유형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국어 시간에 고등학교 2학년 수학 문제를 푸는 모범샘들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고 있었다.(89p)

 

 

유치원생들에게 참치를 그려보라고 하면 물고기가 아니라 통조림 캔을 그린다고들 했다. 진짜 참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잘 정리된 언어는 뼈대와 비늘을, 씹을 수 없거니와 혀에 상처까지 남기는 부분을 우리에게서 벗겨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무해하고 다정한 환대를 말하는 책들이 우리를 우아하게 모욕한다고 느꼈다. 우리를 매대에 올릴 만한 상품으로 소모시켜버린다고 느꼈다. 이 정도의 누추함은 감당할 수 있다는 오만을 판매하는 것이다. 어둡고 질척한 덩어리에서 슬픔과 연약함처럼 투명한 감정만 추출하고 기이함과 추함과 주먹질과 발작적인 웃음 따위는 모두 없는 척 내버리는 것이다.

쓰레기장에 핀 꽃을 보고 감동하지만 악취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 오로지 검댕을 이기고 핀 꽃을 보기 위해서만 쓰레기장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았다. 그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의 명세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해로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도리어 치워 없애려 들었다.(92-93p)

 

 

울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데도 우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긴 울어서 해결될 만큼 사소한 문제만 있으면 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132p)

 

 

태초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뒤에야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꼈다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

예상하긴 했지만 지금껏 살아온 곳과 해온 것들이 한순간에 모두 부끄러워졌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려는 시도는 자해 같았다. 속물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그럴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쓰레기장을 외면함으로써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일단 쓰레기가 아니어야 하는 법이다.(154p)

 

 

내가 논하고 싶은 것은 남의 엄마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상식이 아니다. 내 엄마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며 나는 그런 애가 아니라는 항변도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다. 만약 내 엄마가 그런 여자고 내가 그런 애라면, 너희는 나를 이렇게 취급해도 되냐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공부할 마음조차 다잡지 못해서 그 길로 흘러갔으면, 나는 이대로 버러지 취급을 받아도 되냐는 것이다. 예쁘지도 선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짓밟아버려도 되냐는 것이다.

(...)

악함과 약함과 불쌍함은 다른 체계일지라도 뒤섞여 있다. 슬픈 사연만으로 면죄부를 주었다가는 세상이 무너지겠지만 그 사연이 없었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정말로 앞뒤가 맞지 않은 방식으로 질서정연하다.(160-161p)

 

 

포착하기란 하나의 상을 확정하며 시야 바깥을 잊는 일이고, 말하기란 보이는 것에 언어를 덧씌우고 나머지를 거스러미처럼 내버리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이 삶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는 중인지를, 무엇을 갚고 무엇을 청구할지를 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여러 곳을 동시에 볼 수 없고 생각이 뻗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보통은 순간적인 이미지에 눈이 멀거나 이미 지어진 말을 빌려 쓰게 된다. 프랜차이즈의 햄버거 세트처럼 건강이나 맛이나 영양소가 조금씩 부족하지만 언제든 시켜 먹을 만큼 간편한 말들. 낯선 가게에 들르는 도박이나 스스로 요리하는 곤란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들. 그러니까 괴물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인 일이라고들 하지만 어떤 괴물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고, 마음 편히 연민하고 싶은 것들은 그러기 어려울 만큼 더럽거나 이상하거나 사납고, 반대로 악취와 더러움 속에 숭고함이 숨어 있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 가는 것이 마냥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싫은 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그 애매한 역설을 계산에 넣는 대신 상식을 고수하는 건 정말로 편함의 문제인 듯하다. 상식이 끝나는 자리에서 세상도 끝난다고 믿어버린다면 더 멀리 나아갈 필요 또한 없는 법이다.(194-195p)

 

 

 

ㅡ 단요, <케이크 손>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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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전체적인 설정이 지구 끝의 온실과 되게 비슷하지 않나? 그때는 돔시티 안에서 밖으로 나오며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번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며 벌어지는 일, 내성종이라는 설정과 유사한 광증 저항 등. 지구 끝의 온실보다는 다소 아쉬웠다.

 

 

 

물론 경계 지역은 불완전했다. 범람체와 인간은 너무 달랐고, 여전히 경계 지역 밖에서 범람체는 인간을 파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멀리 가고 싶어했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태린은 그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질문이라고 생각했다.(418-419p)

 

 

 

ㅡ 김초엽, <파견자들> 中,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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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8

 

 

 

“조사관님은 대통령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람이 자기 주변의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내가 만약 태양광발전 사업자라면,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라는 작물을 키우는 농부라면 하늘이 흐린지 아닌지 정확히 알아야 할거예요. 하지만 그저 산책을 즐기는 행인이라면 밖에 나가 있는동안 비가 올지 안 올지만 알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흐리면 기분이 가라앉죠. 우리가 그런 동물이니까. 그렇게 진화한터라. 그럴 때 하늘을 파란색으로 보이게 해주는 색안경을 쓰면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그런 색안경을 쓰면 안 될 이유가 뭐죠? 색안경이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다고?”(22p)

 

 

그러나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수정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 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 몰래 물에 타놓은 그 약을 모르고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84-85p)

 

 

「뉴요커」에 원고를 보내는 순간까지 내가 체험 기계의 의미를 파악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아마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기계가 인류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버드대 철학과 폴 레비나스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레비나스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타자화와 배제는 인간존재와 인간적 사유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성은 숭고하고 근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거기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거듭되는 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픽션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윤리는 모두 그런 타자화와 배제를 통해 발전돼왔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마, 성폭력범, 아동 학대범들에게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을 굳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닮은 존재여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다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때로 인간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게 레비나스 교수의 관점이다. 레비나스 교수는 하버드대 신문에 발표한 특별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171p)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자란 식용식물을 채취해서 먹는다면? 그리고 배양육은? 여기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술에 몹시 취했거나 깊이 잠든 사람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성폭행하는 일은 나쁜가? 청각장애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시각장애인의 얼굴 앞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일은 나쁜가? 신경계가 다 자라지 않은 태아를 총름파나 방사선으로 원거리에서 조각조각내는 일은 나쁜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즉, 내가 묻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내가 어떤 도덕적 명령을 지키고자 할 때 그 대상이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가 과연 중요한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고, 내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도덕적 명령은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식물 역시 생명이므로 나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 않다. 동물의 알을 먹지 않는 것처럼 곡물이나 씨앗을 먹는 일도 피하고 싶다.(187p)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측이나 분석이 아니라 행동이다. 언제나. 그날 마콘도의 주방에서 그 단순한 진실을 알았던 사람은 송유진이 아니라 대리였다. 그녀는 송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눈을 감은 채 송유진에게 다가갔다.(380p)

 

 

ㅡ 장강명,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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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나는 이 취미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취미란 단어는 악취미의 줄임말과 같은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람들이 진짜로 즐기는 유희는 고상한 것보다는 다분히 악의적인 것들이 훨씬 많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커피 전문점 사장의 진짜 취미는 유부녀 홀리기였다. 사장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 취미는 돈도 들지 않고, 위험 부담도 없는 데다, 짜릿한 재미까지 철철 넘친다고 했었다. 이 취미에 문제가 있다면 신상카드에 떳떳이 기록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13-14p)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21p)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 있다면 그만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영규라면 절대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영화를 보아야 하는 사람이고, 마음에 정해둔 음식점에서 정해진 메뉴대로 식사를 해야 할 사람이며, 역시 마음에 계획한 도로를 달려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를 끝내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76p)

 

 

“내 이름은 안진진. 돈 갚을 때는 조용히 안진진을 찾으세요. 아셨죠?”(113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127p)

 

 

‘8월 27일. 밤 10시 정도. 장소는 유리 천장이 있는 환상적 분위기의 카페로 정한다. 먼저 여자의 손을 잡는다. 별다른 저항이 없으면 십 분쯤 후 청혼한다·····.’

그것은 나영규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작성해온 8월 27일자 인생계획서 중의 한 부분일 것이었다. 그의 청혼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상상 속의 이 인생계획서는 나를 전율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그리고 나는 또 보았다. 조금 전 상상 속에서 보았던 그의 인생계획표 다음 구절을.

‘성공적인 청혼 후에 기회를 봐서 기습적인 키스 감행. 서두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할 것······’

(...)

그런데 그것도 모두 미리 짜놓은 인생계획서대로 움직인 것이라면? 여자에게 샌드위치를 먹인다, 약 한 달간 매일 함께 먹는다, 그리고 말한다, 자꾸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라고 메모하고 있었던 일이라면·····.

(...)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160-165p)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188p)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로 잡다한 책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책과 영화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을까. 사랑을 맞은 후의 느낌이 이토록 황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이 안진진에게 문제가 있음이 확실했다.(195-196p)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 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섭렵은 끝났다. 사색이 깊은 나머지 인생 자체가 졸렬해지고 말았다면, 이젠 이해할 수 있을까.(217p)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내었다. 김장우와 나영규에게로 향하는 화살표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변별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유사 사랑인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사유일지도 모른다.

(...)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218p)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229p)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296p)

 

 

 

ㅡ 양귀자, <모순> 中, 도서출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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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6

 

 

제목만 보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러니까 나는 대충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약물을 모두가 사용하는 세계를 다룬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는 말. 오히려 그런 약물을 원래 의도했던 목적과는 다른 의도로 사용하는 사이비 집단과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가까웠다. 정보라 작가가 쓴 작품 중 처음으로 읽은 책.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284-285p)

 

 

 

 

ㅡ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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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6

 

개의 설계사를 읽을 때만 해도 단요 작가의 전작을 다 찾아 읽을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출간된 책 기준으로는 이제 다이브를 제외하고 다 읽었다. 근 2년 동안 이렇게 쏟아낸 작품들이 미리 써둔 원고라기보다는 2년간 쓴 작품이라고하니 앞으로도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건 내 고질적인 문제였다. 정의의 편이 되기에는 야심이 부족하고 악당이 되기에는 겁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희비극에 실컷 도취되기에는 또 자기객관화가 잘됐다.(36p)

 

 

존엄은 돈과 맞바꾸지 못한다지만 그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이미 팔린 낯을 돈으로 거둬들일 수는 없어도 돈을 받고 낯을 팔 수는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들은 방송에 나와서 집안사정을 털어놓은 다음 무료 상담을 받고, 도박중독자는 유튜브에서 회고록을 읊어 댄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그래야만 앞날이 편해지는 사람도 있는데 돈에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50p)

 

 

돈을 벌면 앞으로 어쩌지. 잃으면 또 어쩌고. 막막하게만 들리는 문장이었지만 답은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그런 질문들은 내가 수익률의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만 유효했고, 월급의 세계로 떠나는 순간 금방 우스워졌다. 생산직으로 공장에 입사하거나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는 건 일반적인 삶의 조건 중 하나이며 다들 슬플 것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나는 정장을 입지 못하는 미래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미덕이,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였다. 돈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다시 부푸는 데에는 사라질 일 없는 월급이 적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이는 것과는 다른 역동성이 있었다. 사람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역동성. 나는 한때 풍선을 부풀린 다음 적당히 자리에서 묶는 법을 알았다. 그것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풍선 탑을 쌓아올렸다·····. 지금도 그게 그리웠다·····. 탑의 높이가 아니라, 내가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나한테는 현금 2,000만 원이 있다. 이것으로 ETN을 살 게 아니라, 월요일 장이 열리자마자 크루드오일 매도를 잡으면·····.(68p)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적이었다.(71-72p)

 

 

메뚜기 떼와 코로나19는 하나님이 타락한 현대인에게 내리는 심판이라는 거였다. 심판. 또 심판이다. 그런 이야기를 기사에 옮겨 적는 걸 보면 편집국 일동도 목사에게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에 저주가 내리는 장면까지만 읽고 성경을 덮었나 보지.

나는 그 뒤의 내용도 알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욥.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불행을 내린 것이라며 욥을 탓하고, 욥은 억울해한다.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욥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어처구니없이 휘말렸을 뿐이다.

이야기의 교훈은 명확했다. 세상은 원래 까닭 없이 끔찍해지는 것이니까, 타인의 불행을 두고 욥의 친구처럼 굴지 말라는 거였다. 수천 년 전의 중동에도 그 교훈이 필요한 사람은 참 많았나 보다.(83p)

 

 

내 뷰가 옳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를 좋아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 조건부란 안정성의 다른 말이다. 이유 없는 것들은 그 이유 없음으로 인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147p)

 

 

승리의 트로피를 받아 들었을지라도 그 순간을 영원히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충만감은 삶을 채우기에는 너무 짧고 욕망이란 이루어진 목표를 새로운 목표로 교체하는 부단한 과정이므로. 그러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사실 둘뿐인지도 모른다. 갈증 속에 내달리다가 때때로 주어지는 기쁨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것. 혹은 갈증도 짜릿함도 내버리고 다만 평온해지기로 마음먹는 것.

후자가 마음의 문제인 이유는, 욕망하기 위해서는 투지가 필요한 반면 욕망을 멈추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둘 중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다가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하지도 원치도 않았던 곳에 도달해 있기 마련이었다.(218-219p)

 

 

 

ㅡ 단요, <인버스> 中, 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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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8

 

 

수연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노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수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온유에 사는 공헌자 노인들이 좀더 품위 있고, 친절하고, 대하기가 까다롭지 않은 고객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수연은 덧붙였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63p)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성을 지녔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강하다는 것과 연결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처음 대피소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나와 아마라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척 기뻤다. 내성이 있다는 말은 모두 죽어가는 저 바깥에서도 안전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매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절반 정도만 옳았다. 더스트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아마라도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128p)

 

 

(...)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하니 지수 시를 보았다. 그가 나를 마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227p)

 

 

 

 

ㅡ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中, 자이언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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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9

 

인버스도 읽어야겠다.

 

 

전기차가 경유 승용차의 친환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전기차는 실제로 더 적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생산과정마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전기차의 리튬 이온 배터리는 양극재로 LCO(리튬·코발트·옥사이드) 혹은 NCM(니켈·코발트·망간)을 사용한다. 리튬은 대량으로 퍼 올린 지하수에서 해당 광물을 추출하여 생산되는데, 이러한 채굴 방식은 환경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주변 농작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리튬의 주요 산지는 칠레와 페루 같은 남미 국가들이다. 선진국의 땅은 환경오염과 정화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너무 비싼 반면, 남미의 개발업자들은 군·경과 결탁해 약탈적 채굴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를 매달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기차는 희토류 채굴로 인한 환경오염을 제3세계에 떠넘기는 동안만 온전히 친환경적인 셈이다.(56p)

 

 

제본스의 역설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가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란 전망과 달리 실제로는 가사의 기준을 높였던 것처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질수록 전력 사용량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처럼, 발전과 혁신은 새로운 욕망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따금 욕망은 개선과 해결을 막는다.(58p)

 

 

사회에 기여하지 않거나 덜 기여하는 행위는 무가치한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이외의 자향점은 없단 말인가?

수전 울프가 1982년 발표한 논문 <도덕적 성인>은 ‘모든 행위가 가능한 최대 한도로 선한 사람’을 도덕적 성인으로 정의한 후, “도덕을 최고의 기준으로 두고 판단할 경우, 우리의 가치들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논지로 끝을 맺는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도덕적 성인이 되려 한다면 세상은 훨씬 칙칙해질 게 분명하다. 이러한 논변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순수수학, 이론물리학, 천문학, 고생물학···.

그 모든 일은 분명히 인류의 문명에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안겨왔다. 수레바퀴의 기준과는 다른 가치의 체계에 속하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수억 광년을 통과해 다가오는 빛을 포착하기, 영어의 음성체계에 대해 고민하고 구조를 분석하기, 그리고 심플렉틱 다양체에 대해 생각하기.(116-117p)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기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애들보다 제가 살 만한 건 맞는데, 기분이 묘한 거죠. 내가 남 도울 입장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애매하게 끼어서. 저한테 열심히 살았다고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거기에 억하심정을 가져봤자 여기 말고는 말할 곳이 없으니까···.”(123p)

 

 

지난 11월, 어느 안티휠 만화가가 수레바퀴를 조롱하는 한 컷짜리 만평을 발표했다. 수레바퀴는 악당이 지을 법한 미소와 함께 이런 말풍선을 드리운다.

“내가 바라는 것은···어느 누구도 긍지를 가지지 않는 것,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지 않고 어느 무엇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랑과 따스함이 아니라 원칙과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가족을 내버리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더디 기뻐하고 분노를 참고 돌처럼 무감각한 것, 더 적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 너희를 이 땅에서 치워버리는 것.”

그런데 나열된 요건들은 악의적인 왜곡이기 이전에 건조한 사실이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스스로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항상 회의하는 것은 나쁜 일인가? 공정한 원리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은 나쁜가?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불행의 숫자를 눈앞의 가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나쁜가? 감정적으로 초탈하는 것은 나쁜가? 물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나쁜가? 인간이 모두 천국으로 떠나는 것은 나쁜가?

나쁘다라는 서술은 특정한 가치 체계 속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정의의 체계와 개인적인 만족감의 체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분명히 내가 만족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정의의 문제라면 반대할 이유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것과 옳은 것을 곧잘 혼동한다.(173-174p)

 

 

 

ㅡ 단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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