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3

 

제목만 보고 국내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과 마진율에 대해 이야기할거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적은 에세이었다. 제목은 수록 작품 중 오한기 작가가 쓴 에세이 제목을 따서 지은 거였다. 뭐 그렇다고.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많이 쓰는 행위 자체를 우려하는 것에 대해, 혹은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내 안의 무언가를 소진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째서 소설을 쓰는 행위가 계속해서 소진되는 과정이어야만 하는 걸까?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나 자신을 추동하는 힘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는 걸까? 쓰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성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고, 쓰는 행위 자체를 동력으로 삼아서 쓰고 쓰고 또 쓰는 작가가 있다고.(74-75p)

 

 

 

ㅡ 김사과 외,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中,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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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0

 

트위터, 투비에서 쓴 일기 및 포스타입에 쓴 일기에서 이미 언급했던 내용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서술이 달라서인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서 러스브리저는 소설가 아널드 베넷의 말을 인용한다. 베넷은 우리에게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음악, 그림, 달리기, 기차 모형 세트, 혹은 그 밖의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살아 있기에도 바쁜데 다른 걸 할 시간이 어딨어? 베넷의 대답은 단호하다.

"우리에게 시간이 추가로 주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한 시간이 모두 주어져 있다."(50-51p)

 

 

늘 너무 피곤하다. 정말 일찍 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다니 나는 정말 야행성인 것 같다. 문제는 세상은 야행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도 야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축난다는 것···.

잠을 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적당한 시간에 자러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초조함과 불안과 아쉬움, 뭐 그런 것들 때문이다. 오늘이 만족스럽고 내일이 기대되고, 이렇질 않으니 선뜻 자러 갈 수가 없는 거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러 가고, 눈을 뜨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톡홀름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던 악셀 린덴은 어느 날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 목장으로 내려가 양을 치기 시작했다. 목장 생활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맞은 봄, 5월 6일의 일기를 린덴은 이렇게 썼다.

 

다들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속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 지속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이 지속 가능했던 적도 없다. 그런데 다들 별일 아닌 척한다. 좋은 생각이 있는 척, 바꿀 수 있는 척한다. 왜들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내 말이.(211-212p)

 

 

 

 

ㅡ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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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수천 개의 영어 작품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전형적 서사 형식을 추론할 수 있었다.

'누더기에서 재물로’

'재물에서 누더기로’

맨인홀

이카로스

앞에서 언급한 신데렐라

오이디푸스(53-36p)

 

 

몇 가지 극적 구조에 대해 속성으로 알게 된 여러분은 이제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분명 궁금할 것이다. 여러분이 제 2의 댄 브라운이 될 계획이 아니라면 여기서 여러분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재의 내러티브는 어떠한가? 도널드 트럼프와 앙겔라 메르켈은 언제 나오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 바란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서사 구조의 편재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다. 왜냐하면 영화와 문학뿐만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형식에서 서사 구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허구이든 사실이든, 뉴스, 교육, 광고를 비롯하여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에서 서사 구조가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위 '마스터플롯'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다. 어떤 전문가에게 묻는지에 따라서 스토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스터플롯은 두 개부터 예순아홉 개까지 구분할 수 있다. 커트 보니것이 제시한 원형이 감정적 전개 구조를 제공하는 반면, 마스터플롯은 주인공을 부추기는 에너지, 거대한 갈등이나 소망을 기술한다.(58-59p)

 

 

<저머니스 넥스트 탑모델>에서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몇몇 포맷이 한 가지 마스터플롯을 제시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마스터플롯이 혼합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성장 스토리를 플롯과 더불어 앞에서 언급한 경쟁, 약자, 포괄적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참가자들의 변신이 함께 나타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스토리를 본다. 말하자면 젊은 시청자에게는 동일화나 투영이라는 이유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고, 나이 든 시청자는 이러한 포맷을 역설적으로 보면서 경쟁 상황을 더욱 재미있게 즐긴다. 또한 이성애적 성향의 남성은 에로틱한 남성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혼합 방식이 성공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혼합 형식은 마치 서사 만화경처럼 여러 플롯을 제공하고 시청자가 적어도 그중 하나의 플롯에서 자기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와닿는 스토리를 본다.(69p)

 

 

최근에 자주 보이는 캐스팅 쇼나 매우 진부한 광고가 여전히 하나의 마스터플롯에 따라 작동한다면 영웅은 기본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재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갈등도 함께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전통적으로 영웅을 탄생시키는 전쟁을 더 이상 겪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유화된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이 해석 권한을 둘러싼 전쟁과 닮았다. 전투에서의 군사적 용기가 오늘날에는 시민의 용기, 비타협적 태도,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화와 숭배 메커니즘은 똑같이 남아 있다. 브뢰클링에 따르면 오늘날의 영웅은 우리 약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묘사한다. 이를테면 "사랑의 아픔, 알코올 문제, 오만함, 급한 성미, 우울증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인간적인 결점"을 말이다. 이와 동시에 오늘날의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외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71-72p)

 

 

'화물 숭배'개념은 상관성을 인과성으로 미화시키느 믿음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조롱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자신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노리개에서 자기 운명의 플레이어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인과적으로 생각하고 결과는 반드시 무언가로부터 말미암은 것, 즉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상적으로 그 근원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시도 자체를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제부터인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적인 행위이며,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기발하고 능동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다. 무언가를 신에게 바치면ㅡ예를 들어 비를 내리도록ㅡ신을 더 잘 달랠 수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음 날 또 제물을 바친다. 이는 풍족한 수확물을 얻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날씨에 우리가 조금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완전히 타율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

(...)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해하면 우리 적응력에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 생겨난다. 즉 어떤 것이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닥치거나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위협적인 상태를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ㅡ오늘날에는 시행착오라고 말하기도 한다ㅡ를 통해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적, 외적 변화를 통해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웅 여정을 통해서.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제를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어 있는 '공백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족을 느낄 수 있다.(83-84p)

 

 

 

연구진은 환자에게 한쪽 뇌에서만 볼 수 있는 물체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연구진은 피험자에게 일어나서 물 한잔을 가져올 것을 칠판에 써서 요청했다. 그런 다음 피험자가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다. 피험자의 양쪽 대뇌 반구는 칠판에 적힌 정보와 질문 내용을 공유하지 못해 이를 전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즉 언어 중추를 담당하는 좌뇌가 설명을 생각해냈다. 피험자는 "목이 말라서요."라고 말했다. 급하게 만든 이유라도 자신이 왜 일어나서 물을 가져왔는지 전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나았다. 연구진이 피험자에게 정말 갈증을 느꼈는지 재차 물어보자 그는 당황했다. 말하자며 그의 말은 변명이었다.(99-100p)

 

 

우리가 맛이 뛰어난 샌드위치를 먹거나 환상적인 섹스를 할 때, 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든 계속 해, 최고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전달물질이 방출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추진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도파민의 효과다. 도파민을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도파민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한다. "도파민은 즐거움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대한 기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행복 자체가 아니라 행복을 향한 노력에 관한 것이다."(106p)

 

 

스토리는 이야기되는 내용을 가리키며, 이야기는 이것이 어떻게, 어떤 동기로 행해지는지를 나타내며, 내러티브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야기가 전해지는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여자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한 남녀에 대한 스토리의 경우 이야기는 유혹, 죄책감, 추방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지배적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즉 '여성은 위험하다.'(162p)

 

 

브로딧츠키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적 차이는 우리가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영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사고 유발요인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목격자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사건, 즉 불의의 사고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떄 서로 다른 관찰자는 이미 자신의 언어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인식하며, 따라서 세부적 내용도 다르게 기억한다. 이는 증인 진술과 법적 결과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로딧츠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언어는 우리가 사건을 판단하는 방식을 조종한다."(169p)

 

 

우리는 우리의 서사 본능을 작동시키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종종 우리 자신이 그렇기도 하다)을 너무 쉽게 믿으면서 바라본다.

우리가 기존의 (자기) 서사의 일관성을 위해 견지하는 가장 흔한 인식의 왜곡은 확증편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ㅡ또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것ㅡ을 믿으며 그에 따라 모든 정보를 분류한다. 렐로티우스도, 프린스 모노룰루도 어느 정도 이러한 확증편향을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과 상충하는 지식보다 우리의 견해와 의도를 뒷받침하는 지식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적어도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볼 때는 서사적으로 매우 좋지 못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최고의 사기꾼이다.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호도조차 사회학적, 경제적 허구다, 우리는 사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인과관계를 만들어 '나는 그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후판단 편향, 혹은 잠복성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던컨 와츠에 따르면 사후판단 편향은 특히 이례적인 큰 성공이 관찰될 때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더 특별한 성공일수록 그 성공 스토리는 더 훌륭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263p)

 

 

그래노베터는 1978년에 불안과 집단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소위 문턱값 모델을 개발했다. 그의 작업가설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요구나 새로운 이념을 위한 행동을 한 개인에게 제시할 경우 그 사람의 행동이 변하게 된다.

(...)

그는 예를 들어 이념이 어떻게 퍼지는지 조사하는 소위 확산 연구에서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공식을 제시한다. 즉 낮은 문턱값을 가진 개인이 많으면 새로운 이념이 더 빨리 퍼질 수 있고, 문턱값이 높은 개인이 많으면 개혁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와츠는 문턱값 모델을 사용하여 '누적 이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어떤 노래나 책이 다른 노래나 책보다 인기를 더 얻으면 순식간에 몇 배나 더 많은 인기를 얻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노래나 책이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왜 모두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그 이유에 대해 언젠가 모두가 관심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누적은 이렇게 작동되며, 스토리 역시 이와 똑같이 작동한다. 아마도 세상은 실재와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아주 똑같이 거짓과 반쪽 진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264p)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1958년 마이클 던롭 영이 자신의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풍자적인 개념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비굴하게 성과에 집착하고 하이퍼포머, 즉 고성과자의 폭정이 지배하는 2033년 사회의 억압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비록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를 조소적으로 표현했지만 이 개념은 더 정의로운 사회질서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약속으로 발전했다.

(...)

능력주의적 관점은 교육, 직업, 인간관계로의 접근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미 학교 교육에서 재능이나 성과, 자질에서 쉽게 파생되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을 만든다. 거의 모든 서구 사회에서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공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는 여전히 부모의 지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공은 얻어지기보다는 상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더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황금빛 미래가 자신의 성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가 선호하는 자기 서사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모든 역경과 운명에 맞서는 사람으로 귀결된다.(288-289p)

 

 

켄디에 따르면 주라라는 이 책에서 그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했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사람을 단일민족 집단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괄적으로 동종 집단으로 보고 모든 유럽인에 비해 낮게 평가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을 막 시작하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규모로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던 포르투갈 왕실은 주라라의 글 덕분에 완벽한 모험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포르투갈의 본보기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원시성에 대한 주라라의 허구 이야기를 따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람들의 소유물을 빼앗았다.(293-294p)

 

 

인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국을 정복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곳의 거주자를 적대자로 만들며 이와 함께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화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 조정되고 있다. 1929년 미국에서 멕시코인은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30년부터는 더 이상 백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주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무기 생산을 위한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멕시코인은 다시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피부색이 사회적 구성이며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다.(297-298p)

 

 

과거에도 항상 사실과 함께 소문과 신화, 비방이 무성하게 확산했다. 그러한 거짓말들은 지어낸 소문 이상인 것처럼 점점 자기주장과 닮은 척을 하면서 '음모 서사'가 된다. 주라라의 인종차별적 여행기나 노리치의 윌리엄에 대한 반유대주의적인 허구적 성인이야기처럼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치명적인 음모 서사로 '시온 장로 의정서'라는 위서를 꼽을 수 있다. 이 의정서의 초판은 1903년 러시아 제국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으며 나치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 문서는 유대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허구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완전히 지어낸 것이며 다양한 출처에서 모아 조각조각 붙여 만든 것이다.

(...)

시온 장로 의정서는 192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제조업자인 헨리 포드가 수십만 부를 발간했고, 이를 통해 시온 의정서 영어판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졌다. 오늘날까지도 반유대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근거로 내세운다.(339-340p)

 

 

우리는 여성 혐오 내러티브 자체를 종종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

소위 세계 종교의 메시아적 영웅이든,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서사적 영웅이든, 게르만이나 켈트 초기 문화의 전설적 영웅이든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이 영웅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

영웅 여정 안에서 여성은 주인공의 주의를 흐리거나 시험에 빠트리는 존재, 심지어 적대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웅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406p)

 

 

서사적인 측면에서 기후 위기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집단적이며, 악당이나 범죄 조직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인 주도권에 기인한다. 기후 위기는 병든 한 시대의 탈선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커져 나갔다. 특출한 악마도 없고 과격한 집단적 이념도 없으며 적대자로 적합한 공격적인 민족 국가도 없다. 그리고 기후 위기에서는 어떤 영웅이든 상대가 악한 정도만큼만 선할 뿐이며 주역을 배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경우든 이 문제는 집단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믿을 만한 영웅으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세상과 긍정적인 사회적 전환점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과학자, 정치인, 활동가)이다. 그들이라면 사회 전체의 꾸준한 변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90분 만에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창의적인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다른 모든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외면하고 있는데 너째서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438p)

 

 

 

ㅡ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中,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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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9

 

 

“편하게 해. 나는 복잡한 의전 따위는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 신경 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에게는 불편함이 가지 않는 것 말야. 그래도 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치인이네. 그래서 더더욱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하는 건지 모를 정도의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

(...)

지시는 미세하면서도 복잡했다. 결론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사전에 검토해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돋보이고, 인간으로서는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였다. 단 티가 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다. 더 많은 관심과 긴장이 요구됐다.(64-65p)

 

 

제가 소대장을 할 때 저의 소대원이 같은 소대 부소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피해 사실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소대원은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병이었는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며 부소대장이 아침 GOP 작전 철수 중에 이병의 얼굴을 구타했습니다. 부대 복귀 후 입가에 피가 묻은 소대원을 보고 여러 차례 물었는데도 소대원은 한참 스스로 넘어진 거라고 진술하다가 결국에는 부소대장에게 맞았다고 제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후 부소대장이 상급부대 보고를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 하였을 때도 저는 헌병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여 수사를 받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과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힘의 불균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제가 지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보다는 격리 조치부터 먼저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197p)

 

 

 

ㅡ 문상철, <몰락의 시간> 中,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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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4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116p)

 

 

 

ㅡ 안온, <일인칭 가난>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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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

 

 

영화에서 사이보그는 머리에 전극을 꽂고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뇌의 데이터가 컴퓨터로 바로 옮겨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뇌과학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메모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 컴퓨터에 저장된 것을 뇌로 전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작은 전자칩을 팔에 이식하고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칩은 건물 출입 카드나 버스 승차권을 대체하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고 있다. 전자 칩은,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뇌의 명령을 받아 작동되지 않는다.

(...)

몸에 전자 칩을 이식한 것만으로 사이보그라고 부르기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우리 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자로 인간 행위자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기계를 바꾸고, 기계는 우리를 바꾼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우리는 전례 없이 기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기계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기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이보그화되었으며, 사이보그는 우리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계가 우리 몸에 삽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74-75p)

 

 

섀넌이 선택한 필진 대부분은 섀넌과 친한 사이버네틱스 그룹 회원들이었다. 심리학, 생리학을 연구했던 사이버네틱스 그룹은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 주목했고, 뇌와 비슷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이들이 염두에 둔 ‘생각하는 기계’는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매카시는 처음부터 이런 접근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봤으며, 또한 ‘생각하는 기계’는 꼭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제만 풀면 된다고 추론했다. 생물학적 혹은 구조적 유사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기능만 같으면 됐던 것이다. 비행기가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지 않아도 날 수 있듯이,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실 새처럼 날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듯이, 매카시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오토마타에 관한 책이 출판될 무렵 그는 ‘사이버네틱스’나 ‘오토마타’와 차별화되면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매카시는 이 단어를 어디에선가 보고 자신이 사용했다고 회고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매카시 이전에 이 단어를 사용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94-95p)

 

 

미국에는 이렇게 MIT, 스탠퍼드, 카네기 멜런 세 곳의 대학에 센터가 설립되어 인공지능 연구를 이끌었고,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 설립된 인공지능 연구소가 이 연결망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들은 모두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접근 방법을 ‘기호 인공지능’이라고 불렀다.(99p)

 

 

왜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이에 답해서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 역할을 흉내 내는 임무를 맡기고 이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게 했을까?

튜링의 논물을 읽은 많은 사람이 이 성 역할 놀이를 기계의 지능을 테스트하는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비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튜링 테스트가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튜링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논문에서 향후 50년 안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고’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이 테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튜링이 성 역할 놀이를 테스트에 도입한 이유에 대해 그가 인간-기계의 경계가 임의적이라는 것 외에 남녀의 사회적 성별의 경계 또한(심지어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까지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심판관의 질문들을 잘 살펴보면 튜링이 사고와 욕망의 경계도 문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제노바는 튜링이 인공지능의 성능을 검사하는 테스트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받아들였던 이분법적 사고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심원한 문제의식은 튜링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살면서 성 역할의 경계와 같은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119-120p)

 

 

2차 사이버네틱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성 체계이며,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인간만이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 생명체도, 까마귀도, 개구리도 세상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가진 복잡한 한 자기 생성 체계가 외부 세계에 대해 행하는 작용이었다.

그에 따른 과학적 지식에 객관적이고 절대적 지식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관주의가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세상을 억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행동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는 진리라는 개념 없이도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166-167p)

 

 

 

ㅡ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中,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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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3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다가 허브차를 마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아마도 감기로 휴가를 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삶, 퇴근이 오후 4시인 삶, 신선한 음식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삶, 푹 쉴 수 있는 삶, 그래서 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을 수 있는 삶 아닐까. 반대로 항생제를 바로 먹어야 하는 삶은 빨리 나아야 하는 삶, 휴가를 낼 수 없는 삶, 퇴근이 밤 9시인 삶, 나약하다는 말이 두려운 삶, 자리가 보전되지 않는 삶, 그래서 힘들어도 버텨야 하는 삶일 것이다.(25-26p)

 

 

ㅡ 오지은, <아무튼, 영양제> 中,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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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심 선우가 내가 본 소설과 영화들의 주인공들처럼 행동하길 바랐던 거다. 평생 믿어온 것을 통쾌하게 부정하기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당하게 말하면서 자유로워지기를. 그리고 나도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다. 증명되지 않은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그것들에 짓눌린 삶을 버틸 수밖에 없는····(126-130p)

 

 

신을 믿지 않는 데는 실패했다.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는 거기에 있었다. 신을 믿지 않기엔, 나는 신을 너무 증오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다만 내 삶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연락이 끊긴 지 모래되어 얼굴도 이름도 가물거리는 어린 시절 친구처럼.

(...)

그리고 그것 분하게도 다윗이 희미해지는 속도와 완전히 정비례했다. 정말로 나는 다윗이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열여섯 살의 내게 알려주었다면 그 애는 나를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313-318p)

 

 

 

ㅡ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3>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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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4

 

 

마약은 가히 환상적이다. 당신이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신은 ‘인공 낙원’, ‘천국’을 맛보게 된다. 이제 당신에겐 무서울 것이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야수 하이드가 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 아이언맨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약은 곧 저주가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듯, 술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마약은 이제 당신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한다. 당신은 마약을 위해서라면 몸도 팔고, 가족도 팔고, 당신의 영혼까지 팔게 된다. 마약의 끝은 감옥이나 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덤이다.(9p)

 

 

다이어트 약인 펜터민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사람을 흥분시키고 각성하게 만든다. 펜터민 외에도 펜디메트라진, 디에틸프로피온, 마진돌 모두 비슷한 기전을 가진다. 약을 먹으면 마치 큰 시험이나 발표를 앞둔 사람의 심정과 같아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이 바짝 마르며, 잠이 오지 않는다. 긴장한 상태여서 식용이 없다. 그 결과 먹는 양이 줄어 살이 빠진다. 실제로 펜터민을 투여했을 때 3개월간 평균 9.5kg(체중의 11%)의 체중 감소 효과를 보인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달에는 체중이 극적으로 감소하지만, 두 번째 달에는 주춤하고 세 번째 달부터는 큰 변화가 없다. 또한 국내에서 이 약은 3개월간 쓰게 되어 있는데, 막상 환자들이 약을 잘 끊지 못한다. 약을 끊으면 식욕이 폭발해 음식을 많이 먹게 되고 다시 살이 찌는 요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48-49p)

 

 

그럼 누가 주로 마약을 할까? 우리가 뉴스에서 주로 접하는 마약 사범은 연예인이나 재벌 2세다. 하지만 대검찰청「마약류 범죄백서」(2022)를 보면 마약 사범이 대부분 무직자나 농업인임을 알 수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 8,395명 가운데 무직자가 31.5%에 이른다. 회사원이 6.2%이고, 예술/연예계 종사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로 인해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약을 더 많이 한다. 가난은 만성 통증처럼 마약에 중독될 확률을 높인다. 여러 연구에서 가난과 마약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 (95-96p)

 

 

“선생님,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과 의존성이 없고 효과도 더 좋은데 피워도 되는 거 아닌가요?”

(...)

“처음에 시작한 게 뭐였나요?”

“떨, 그러니까 대마요.”

“그죠? 아시겠지만, 모두 다 대마로 시작해요. 물론 죽을 때까지 대마만 할 수도 있죠. 근데 그다음 뭐 하셨어요?”

“뽕이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

마약중독을 이해할 때는 소프트 드러그와 하드 드러그로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소프트 드러그는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마약으로, 상대적으로 효과가 덜하고 중독과 금단 증상도 약하다. 마리화나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하드 드러그는 강력한 효과와 함께 중독과 금단 증상이 심하다. 코카인과 헤로인이 대표적이었는데, 합성마약인 히로뽕에 이어 펜타닐이 가세했다. 중독성은 환각 계열(대마초, LSD, 엑스터시)이 약하고 업 계열과 다운 계열이 강한 편이다. 처음부터 코카인이나 헤로인 같은 강한 마약을 하기에는 낯설고 무섭고 불안하다. 코로 뭔가를 들이마시는 것이 어색하다. 자기 몸에 주사를 놓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했지만, 담배를 피운다면 마리화나가 제일 쉽다.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1년 동안 대마초를 피울 확률이 무려 10배, 매일 대마초를 피울 확률이 무려 25배 높다. 그렇게 몇 번 마리화나를 피우다 보면 마약을 한다는 불안감도 서서히 줄어든다.

“대마를 경험하고 나니 마약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필로폰의 유혹이 왔을 때 별 망설임 없이 투약하게 되었습니다.” 아편에서 모르핀으로, 모르핀에서 헤로인으로 점점 강해지듯이 대마초도 마찬가지다. 점점 THC 성분이 높은 대마초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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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반이다. 마약을 처음 하기가 어렵지 한번 하면 다른 마약을 하기는 쉽다. 거기에다가 마약까지 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약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 앞선다. 선뜻 새로운 마약에 손을 댄다. 당연히 더 강하고 센 약으로.

미국의 경우를 보면 마리화나에서 시작해 결국 코카인과 헤로인으로 간다. 실제 설문조사에서도 평생 한 가지 약만 사용한 경우는 10명 중 4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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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가벼운 약인 마리화나나 프로포폴 같은 향정신성 약물이 위험한 이유는 이처럼 더 강하고 위험한 약으로 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관문이론이다. 과거 한국에서는 본드에서 가스로, 가스에서 알약(러미라)으로, 알약에서 대마로, 대마에서 필로폰으로 이어지는 마약중독을 ‘엘리트 코스’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대마로 시작해 LSD, 엑스터시, 코카인을 거쳐 헤로인, 펜타닐까지 가는 게 기본 코스다.(107-111p)

 

 

반대로 마약 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환자로 본다면 이들이 더 쉽게 치료를 받아 약을 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계속 말하지만, 마약을 끊는 것은 단순히 의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다만 일반인에게는 마약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질 수 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도 ‘나는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아플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치료 의지가 약해지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마약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인 동시에 환자다. 절대로 마약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만약 마약을 하고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우리는 수술을 받거나 깁스를 한다. 아무런 치료도 없이 단순히 의지만으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깁스를 푼다고 해도 바로 예전처럼 뛸 수는 없다.

(...)

단순히 의지만으로 끊을 수 없다.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증상이 심할 경우 2~3주 정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고 이어지는 외래 치료는 필수다. 약을 끊고 1년 정도 지나면 손상된 뇌와 신경 구조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가족과의 관계, 경제적인 문제 등을 회복하기 위해 각종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이런 재활 치료가 없으면 또 넘어져 다칠 수 있다.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재활이 필수다.(155-156p)

 

 

치료를 받은 중독자들은 대부분 약을 끊을 결심을 하는데 100명 중 92명이 약을 끊는다. 다만 오래가지 않는다. 1년 이상 단약에 성공하는 사람은 겨우 36.9%다. 이것조차도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을 때다. 다시 약을 하고 재발해서 치료를 받는다. 어떤 이는 죽어서야 약을 끊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치료나 도움 없이 혼자만의 의지로 끊는 것은 사실상 “전무하다”.

강한 의지로 어렵게 치료를 받아 약을 끊고 금단 증상에서 벗어나도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일상생활이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인간관계는 파탄이 나 있다. 힘들게 마약을 참고 있더라도 약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거나, 약을 했던 상황에 처하거나, 약을 주로 한 장소에 가면 갈망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전에 마약을 했던 모든 상황, 즉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좋거나, 섹스를 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술을 마시거나, 클럽에 가거나, 특정 친구를 만나는 것이 모두 마약에 대한 욕구를 끓어오르게 한다. 약을 끊으려면 약과 관련된 모든 상황과 장소와 사람을 끊어야 한다. 하지만 마약중독자에게 남은 사람이라고는 마약과 관련된 자들뿐이다. 더욱이 금단 증상과 우울감에 지루함까지 괴롭힌다. 제대로 된 직장이나 모아 둔 돈도 있을 리 만무하다. 새로 시작하려는 삶조차 쉽지 않다.

“출소하면 제일 어려운 점이 경제력이야····.”

마약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계나 파탄 나서 도움받을 사람도 없고, 몸도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일을 하기도 힘들다. 비참하다. 눈앞의 현실을 잊기 위해 가장 손쉬운, 옛날 방법을 찾는다. 바로 약이다.(158-159p)

 

 

 

ㅡ 양성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中,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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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5

 

 

몇 년 전에 파괴적 습관을 고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사전 약속’이라는 것임을 사회과학자들에게서 배웠다.

(...)

그러던 어느 날,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가 이 유혹적인 여성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알아냈다. 배가 세이렌이 사는 바다에 접근하기 전에 선원들에게 자기 손발을 돛대에 단단히 묶어두게 한 것이다.

(...)

나도 살을 뺄 때 이 방법을 썼다. 평소에는 탄수화물을 잔뜩 사다 두고 스스로에게 너는 천천히 적당량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고 말한 뒤, 결국 새벽 2시에 와구와구 먹곤 했다. 그래서 탄수화물을 사두지 않았다. 새벽 2시에 프링글스를 사러 나갈 생각은 없었다.(36-37p)

 

 

그저 시스템에 정보를 더욱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정보를 더 많이 주입할수록 사람들이 개별 정보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었다.

“왜 이런 가속화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수네가 말했다. “그저 오늘날의 시스템에 정보가 더 많은 겁니다. 100년 전을 생각해보면, 뉴스가 이동하는 데 말 그대로 시간이 걸렸어요. 노르웨이의 피오르에 크나큰 재앙이 발생했다면 피오르에 있는 사람들이 오슬로까지 내려와야 했고, 누군가가 그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사는 아주 천천히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19년에 발생한 뉴질랜드 대학살과 비교해보라. 당시 타락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모스크에서 무슬림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 그 상황은 “말 그대로 실시간 방송”되었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그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

이러한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내가 묻자 수네가 빙긋 웃었다. “속도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속도에 빠지는 건 그게 좋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온 세상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어느 주제에 관해 무엇이든 알아내고 배울 수 있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다. "점점 진이 빠지게 됩니다." 수네가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 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51-52p)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해해야 하는 사실, 자신이 앞으로 설명할 모든 내용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건 바로 "우리 뇌는 동시에 한두 개의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을 만들어냈다고, 얼이 내게 말했다.

(...)

이 미신을 사실로 둔갑하기 위해 우리는 애초에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 용어를 하나 빌려왔다. 1960년대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프로세서가 여러 개라서 동시에 두 가지(또는 그 이상)의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의 성능에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 개념을 가져와 인간에게 적용했다.

(...)

자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사람들은 (얼이 설명한 것처럼) "저글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 저 일을 전환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해요. 뇌가 그 사실을 가려서, 의식에서는 아주 매끄러운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순간순간 뇌를 재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고요."(59-60p)

 

 

그때, 주의력을 되찾으려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방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그저 텅 비게 될 뿐이다. 우리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몰입의 원천으로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93p)

 

 

록산느는 18시간 내내 깨어 있다면(아침 6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깨어 있다면) 하루가 끝날 무렵의 반응 속도는 혈중알코올농도가 0.05일 때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잠을 빼앗겨도 살 수는 있습니다. 잠을 줄이지 않으면 아마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거예요. 허리케인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을 거고요. 우리는 분명 잠을 줄일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라요. 그 대가는 바로 몸에서 교감신경계가 활성화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몸은 이렇게 생각해요. '어, 잠을 줄이고 있네. 비상 상황인 게 분명해. 그러니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온갖 생리적 변화를 일으켜야겠어. 혈압을 올리자. 패스트푸드가 당기게 만들어야지. 빠르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도록 당도 더 당기게 만들 거야. 심박도 올릴 거고····' 이 모든 변화는 나는 대기 상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자신이 왜 깨어 있는지 모른다. "뇌는 우리가 빈둥거리면서 드라마 <시트 크릭>을 보느라 잠을 안 자고 있다는 걸 몰라요. 우리가 잠을 안 자는 이유를 모르죠. 하지만 그 결과로 일종의 생리적 비상벨이 울리는 겁니다."(107-108p)

 

 

침실은 적정 온도여야 하는 데, 거의 추울 만큼 서늘해야 한다. 잠들기 위해서는 심부 체온이 낮아져야 하기 때문이며, 체온을 낮추기 힘들수록 잠들기까지의 시간도 길어진다.

(...)

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일이 따분할 만큼 뻔하다. 속도를 늦추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잠을 더 자면 된다. 모두가 이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속도를 높이고, 전환을 더 많이 하고, 잠을 적게 잔다. 우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행동 사이의 괴리 속에 산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그 괴리를 만드는가? 사람들은 왜 명백히 집중력을 개선해줄 행동들을 하지 못하는가? 어떤 힘이 우리를 막고 있는가?(119-120p)

 

 

그러나 레이먼드가 누구보다 먼저 지적하듯이, 이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소설 읽기가 오랜 기간에 걸쳐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을 수도 있지만, 이미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소설 읽기에 더 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그의 연구는 논란과 반박이 많다. 레이먼드는 소설 읽기가 공감 능력을 강화한다는 점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소설 읽기에 끌린다는 점이 둘 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그는 자신이 설명하는 효과가 종이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방한 복잡한 서사에 몰입하는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는 긴 텔레비전 시리즈 또한 종이책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또 다른 그의 연구는 동화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더 좋지만, 길이가 짧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내가 보기에 이 연구 결과는 우리가 소셜미디어에서 목격하는 현상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토막 난 파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는 무언가에 오랜 시간 집중할 때만큼 공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는 목소리의 결을 내면화한다.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소셜미디어를 장악한 단절된 비명과 분노의 파편에 하루에 몇 시간씩 노출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136-138p)

 

 

케이프코드로 달아나기 전에는 정신적 토네이도 속에 살았다. 팟캐스트를 듣거나 통화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 상점에서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지 않고 2분 이상 기다리는 일도 절대 없었다. 모든 순간을 자극으로 채우지 않는다는 생각은 나를 패닉에 빠트렸고, 그러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여섯 시간 동안 그저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 다가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요. 살아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거, 죽음을 카운트다운 하는 시계가 끊임없이 째깍거리고 있다는 거,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이 여섯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리고 죽으면 죽음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거 알고 계신 거 맞죠?(142-143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는 내게 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예여. 개인 차원에서는 단기간 특정 효과를 볼지 몰라요. 하지만 지속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죠.“

(...)

"실제로는 환경의 변화만이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상황에서 개인의 절제가 주요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163p)

 

 

오랫동안 내 집중력 악화의 원인이 나 자신의 탓이거나 하나의 기술로서의 스마트폰 자체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핸드폰이 등장해 자신을 파괴했다고 되뇐다. 나는 모든 스마트폰이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진실이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물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우리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느 정도 많아졌겠지만, 우리의 집중 시간이 입는 가장 큰 피해는 좀 더 미묘한 데서 온다. 문제는 스마트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의 앱과 노트북에서 여는 웹사이트가 설계되는 방식이다.

트리스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의 주의력을 최대한 많이 빼앗으려는 의도로 우리가 사진 핸드폰과 그 핸드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을 설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러한 설계가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사람들이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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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이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선택이며, 실리콘밸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반의 선택이다. 과거에 인간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고, 현재에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트리스탄은 이러한 기술을 전부 그대로 보유하면서, 최대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199-200p)

 

 

우리가 더 심각한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방식이 니르에게 더 편리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더 기본적인 차원을 살펴보자. 진실은, 그와 똑같이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잔혹한 낙관주의의 문제 중 하나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보통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례를 가져다가 그것이 평범한 일인 양 행세한다. 막 실직해서 어떻게 하면 다음 주 화요일에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명상을 통해 평정심을 찾기가 더 쉽다. 완전히 소진되고 스트레스에 휩싸여 또다시 스트레스로 가득할 다음 몇 시간을 버티게 해줄 위안이 절박하지 않다면, 다음번의 햄버거와 페이스북 알림,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기가 더 쉽다. 사람들에게 이게 "꽤 쉬운"문제라고, "그 방해 금지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다수의 삶의 현실을 무시하는 일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우리의 집중력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 시스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를 "낚고" "미치게"만들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 가득한 환경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236p)

 

 

듣기 좋은 자기계발 강의로 연경 끊기의 장점을 알려주는 것은, 그럴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실제로 상사 때문에 긴장을 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긴장 풀기의 장점을 눌어놓는 것은 분노를 유발하는 조롱과 같다. 기근 피해자들에게 리츠 호텔에서 식사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를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산이 많아서 일할 필요가 없다면 아마 당장 이러한 변화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우리는 빼앗긴 시간과 공간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마침내 휴식을 취하고, 자고,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305p)

 

 

 

ㅡ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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