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from Movie 2019. 5. 19. 01:27

1. 사랑, 그 우연.

선남선녀가 나오는 청춘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하며 볼 수도 있겠다. 뭐 이런 거 아닐까. 우연과 선택에 대한 영화. 아사코가 하필이면 바쿠를 만나고, 서로를 인지하게 된 건 철저히 우연의 산물(폭죽),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쿄에서 똑 닮은 사람을 다시 만난 것도 우연이고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바쿠라는 사람을 먼저 알게 됐고, 료헤이가 그를 닮았기 때문에 연인 관계로 이어진다. 그렇게 일상이 흘러 가다가 크나큰 실수를 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수습하고ㅡ그렇다고 다 수습된다는 말은 아니지만ㅡ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며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는 훈훈한 이야기.

 

2. 타임라인으로 서사 정리

우연한 만남 이후, 아사코와 바쿠는 사귀게 되고 친구 오카자키네 집에 놀러간 날 바쿠가 사라졌다가 그 다음 날에 돌아옴.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사라짐.

시간이 흘러 2년 후 도쿄에서 바쿠와 닮은 료헤이를 만남. 그리고 잠시 사라졌다가 지진이 발생한 날에 돌아와 사귀기로 함.

다시 5년을 건너뛰어 그들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살고 있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쿠가 나타남. 그리고 같이 가자는 한 마디에 바로 바쿠를 따라감. 처음 관람할 때 이 부분이 가장 납득이 가지 않고 ‘얘는 또 왜 이러나’ 싶었는데, 사랑과 의리는 다른 거라는 친구가 보낸 문자 내용과 바쿠와 함께 있는 차 속에서 아사코의 대사(자신은 긴 꿈을 꾼 것 같다고 얘기함. 그 꿈에 속에서 본인이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꿈에서 깨보니 다시 원래 자리. 이를 통해 자신은 료헤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바쿠라는 미지의 어떤 인물이 자신의 일상을 흔들자 바로 무너짐. 같이 가자고 하는 말 한 방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료헤이와의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기도 함.)를 생각해보고 납득함.

그렇게 과거의 사랑이자 지금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바쿠를 따라간 아사코는 결국 그와 잘 먹고 잘 사는가? 그렇지는 않고 아사코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만회할 ‘선택’을 함. 이 선택이 여러모로 성숙한 결정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 해도 어렸을때는ㅡ지금도 더러 그러겠지만ㅡ어떤 일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수습하려 하기보다는 도망가기 바빴고, 그게 아니라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뒀는데 그게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수습이 됐다. 근데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내가 아닌 누군가 나 대신 일을 수습한 것. 근데 나이를 한 살 씩 먹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그런 일을 수습 해주는 사람이 늘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 그리고 될 대로 되라고 행동을 하면 진짜 될 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 그 후로는 사람이 살면서 완벽할 수 없고, 실수 투성이의 삶이 평생토록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실수를 하면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수습할 수밖에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많은 경우 내 실수는 결코 수습되지 않을 것이고, 내가 노력을 기울인다고 당사자가 내 행동을 모두 용서 해줘야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일은 결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지만,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더디더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이나마 과거보다 나은 인간으로 향하는 길 아닐까. 그래서 아사코의 ‘선택’과 그 이후에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는 모든 상황을 감내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3. 지진의 맥락 분석

시바사키 토모카의 원작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2011)이 발생하기 전에 출간되었으므로 지진이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화하면서 현재 시점의 일본을 다루는 영화에서 일본인에게 큰 영향을 준 지진을 뺄 수는 없었다고 감독은 밝힘. 물론 본인이 처음에 지진을 넣은 것은 아니고 함께 각본을 집필하던 다른 작가가 먼저 지진을 넣자고 얘기를 했고, 생각해보니 아주 좋은 각색이었다고 생각함.

영화 내적인 작품 분석이 아니라 지진이라는 외부의 맥락을 가져와서 이 영화를 살펴보면 단순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 믿고 의지했던 일본 정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고 봄.

작품 내의 료헤이가 아사코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사코의 전 남친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그래도 아사코를 믿으며 사랑을 지속하고자 노력했음. 그러나 아사코는 일본에 갑작스럽게 지진이 일어났던 것처럼,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고 바쿠를 쫓아감. 그 이후에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상황을 수습하고 삶을 원래 자리로 돌리려고 하겠지만 극 중 료헤이가 ‘평생 난 널 못 믿을거야’라는 말을 한 것처럼 아사코와 료헤이의 앞날이 완벽한 신뢰 관계 속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불신과 불안이 내재된 상태에서 지속 될 거라고 예상되는 것처럼, 작품 외의 일본인의 삶도 재해를 복구하고 원래 자신의 삶으로 언젠가는 돌아가겠지만 지진이 있기 전처럼 정부와 시스템을 완전히 신뢰하며 살아갈 수는 없겠다는 점을 나타냄.

결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낙관적으로 해석했다. 어떤 삶이든 사랑이든 완벽한 확신ㅡ만약 그러하다면 그건 오만이라고 생각한다ㅡ속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고, 인생에서의 특정한 사건으로 완벽을 꿈꾸던 삶은 산산조각 났지만 그것을 이어 맞혀가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닐까?

 

 

-(반복과 유사성)

1. 오카자키의 집에서 멀어지는 장면(남자의 시점숏) vs 밴을 보내며 손을 흔드는 장면

2. 바쿠는 두 번 사라지는데, 한번은 금방 돌아옴. 그러나 시간을 흘렀다가 또 사라짐. 아사코도 두 번 사라짐. 한 번은 사라졌다가 지진에서 만남. 그리고 5년이 흘렀다가 바쿠와 함께 사라짐.

cf) 이 영화는 많은 반복이 나오지만 바쿠의 ‘사라짐과 나타남 그리고 다시 나타남’은 나중에 아사코의 ‘사라짐과 나타남 그리고 다시 나타남’으로 비슷하게 변주 됨.

3. 사진전이 두 번 등장(나와 타인들)

4. 내려다보는 장면(료헤이가 담배 피는 공간에서 고양이 밥을 주는 아사코 내려다봄 vs 비를 맞으며 고양이 찾는 장면에서 비슷한 구도 반복)

5. 아사코가 의도한 키스(한 번은 오토바이 사고 후의 키스 vs 료헤이의 안마를 하는 장면)

6. 오카자키네 집도 두 번 등장(다른 맥락)

7. 남2여2(오사카에서도 총4명 vs 도쿄에서도 총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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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US)

from Movie 2019. 3. 31. 02:26

감독의 전작인 ‘겟 아웃’도 그랬지만 이번 영화도 개봉 전부터 워낙 화제가 됐던지라 몹시 기대하며 보러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겟 아웃’보다는 덜 좋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겟 아웃’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머나먼 얘기일 과거 노예제 시기의 흑인 처우와 차별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당대의 관객들이 더 와 닿을 수 있을, 현시대의 흑인이 당하는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방식의 차별을 대단히 예리하게 풍자하며 명확하게 메세지를 드러냈다. 딱 떨어지는 이 완결성이 나에게 좋은 감상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런데 ‘어스’는 조금 달랐다. 정교한 상징과 미장센은 여전해서 ‘겟 아웃’과 마찬가지로 반복 관람이 훨씬 영화를 풍부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면은 비슷했으나 한층 모호한 주제로 복잡한 해석을 요구했다. 그리고 후반부는 명백히 무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영화를 다 보고서도 관객에 따라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전달하려는 주제의 모호함ㅡ감독이 의도한 결과겠지만ㅡ은 영화의 완성도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전달하는 방식에서 조금 무리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공식 의견은 현재 미국 사회에 대한 영화(US=United states)라고 한다. 이 말을 고려해서 나는 크게 두 가지 면을 생각해봤다. 첫 번째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도 흑인의 차별 문제를 다루는 영화인가. 둘째, 모든 개인에게 존재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서로를 견제하며 우위를 점하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인가. 우선 나는 별다른 의식 없이 흑인이 주요 배역으로 나오는 영화다 보니 경험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흑인 문제를 다룰 거라는 쉬운 생각을 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극 중 흑인 배우들은 기존의 수많은 영화에서 백인배우들이 맡았던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백인’의 역할을 연기한다. 반면 배역이 역전된 백인들은 보조적인 역할로 등장하여 잔인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것을 보고 지금까지 백인이 맡아 왔던 역할을 흑인이 대신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인종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고, 물론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폭넓게 본다면 배우가 흑인일 뿐이지 꼭 특정 인종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던 게 아니라 미국사회 전체에 대한 커다란 얘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를 구성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현 시대에 진정한 적은 나와 다른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보기 싫어서 억압하고 외면했던 나의 그림자 아닌가. 지금까지는 이런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윤리적이고도 정치적인 이유로 억제하고 드러내지 않았다면 대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그 모습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찬 받는 시대까지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에 미국과 멕시코를 가로지르는 시대착오적인 장벽이 세워졌을 것이다. 극 중 지하 인간들(=어두운 면)은 지상의 인간을 죽이고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만든다. 이 장면을 위의 말과는 달리, 무시당하는 소수인종들이 잠깐이나마 사회의 주류를 제압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나 과거 캠페인의 결과처럼 일시적인 깜짝쇼로 기능하고 궁극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풍자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하 인간들(=어두운 면)이 잠식한 현시대가 과거의 캠페인처럼 일시적 사건에 불과하고 곧 사그라질 거라는 희망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의 의견을 믿고 싶다.

 

 

cf)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랬듯이 이 영화도 감독이 참조한 레퍼런스를 참고하면 한층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식스 센스, 새, 샤이닝, 퍼니 게임, 장화홍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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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0

 

 

감히 올해의 영화로 미리 점쳐본다. 내가 느끼기에 음악이 조금 과한 걸 제외하고는 연출, 편집, 연기 모두 나무랄 데 없다. 아이의 죽음과 현재를 교차하는 씬에서는 숨이 가빠오고, i can't beat it 한 마디에 결국 무너진다.

 

 

케네스 로너건, <맨체스터 바이 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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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

 

 

내셔널 갤러리의 회화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겹지 않았고,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완성시점부터 노화가 시작되는 회화를 복원하는 과정이 궁금했는데 많은 부분 궁금증이 풀리기도 했고, 복원이라는 말이 이전의 모습으로 갱신하는 게 아니라 균형을 잡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 엑스레이사진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에 숨어있는 밑그림을 알려주는 부분이 신기함.

 

 

프레더릭 와이즈먼,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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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2

 

 

<생각나는 내용과 감상>

 

1. 갈등과 즐거움,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는 게 바로 삶이고 결코 벗어날 수 없다.

2. 신인 배우가 노배우에게 저는 왜 연기할 때 긴장이 안 될까요?”오 가엾기도 해라. 연기를 잘하게 되면 긴장하게 될 거에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이런 게 생각났다. 피아노를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생각만큼 실력도 늘지 않고 연습이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저한테 슬럼프가 온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선생은 학생에게 오 너는 아직 슬럼프라는 게 올 실력이 아니란다.”라고 말하는 것.

3. 떼쓰고 징징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고, 어른이 된다는 건 어쨌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

 

 

에단 호크,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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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22

 

 

결말이 너무 이상적이다.

 

 

<기억에 남는 대사>

 

레즈비언이면서 편견도 심하셔.”

여자랑 섹스한다고 맘이 넓은 줄 아니? 행복을 찾은 것뿐이다.”

 

 

엄마가 나를 버리는구나.”

그럴 때도 됐지.”

엄마 늙어서 힘들어지면 어쩌고요?”

돈 내고 사람 불러야지

 

 

게비 델랄, <어바웃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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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30

 

 

재미있는 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벗어나려고 하다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되면 남을 구실을 찾게 되죠.

 

 

앤드류 니콜, <가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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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30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와 그 나치 포로를 인간지뢰제거기로 사용하는 덴마크군 중 누가 더 잔인한가. 여기서 경중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치가 악마라면 덴마크군 역시 비슷한 수준의 악마일 뿐이다.

 

 

마틴 잔드블리엣, <랜드 오브 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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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4

 

 

선진국 따라하는 거 좋아하면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건 왜 안 따라하나? 30여 년 전 영국을 다룸에도 2017년 현재의 K-조국에서 한 나라를 책임진다는 사람들의 발언을 보자니 참으로 시의적절한 영화인 것이다.

 

 

매튜 워처스, <런던 프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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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4

 

 

그러니까 이 얘기는 이름 모를 한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 죽음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다룬다. 그 감정이란 진료시간이 끝나 병원의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 후에 있을 죽음을 막지 못한 의사의 죄책감으로, 소녀로부터 강압적으로 성욕을 해소하려다 소녀의 죽음을 촉발한 남자의 죄책감으로, 그 죽음을 목격하고도 침묵했던 아이의 죄책감으로, 소녀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도 모른채 했던 언니의 죄책감으로 나타난다. 죄책감이란 뭘까. 인간은 여러 이유로 여러 행동을 할 수 있다. 다르덴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추동하는 힘으로써의 죄책감을 말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대사>

 

죽으면 다 끝이오.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겠죠.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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