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中, 사월의책
2016/6/13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과 ‘행복한 결혼’이라는 거짓말은 모두 사실을 숨긴다. 두 가지 거짓말이 은연중 강요하는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거짓말은 모두 은밀하게 생략법을 사용한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은 화려하지 않은, 아니 비참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홀로 버려진 사람들을 생략한다. 세상에는 분명 결혼 따위는 우습게 알아도 괜찮은 화려한 싱글도 있지만, 생존마저 위협받는 한계적 상황에 놓여 있어도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처참한 싱글도 있다.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하지 않은 싱글에게는 비혼의 상황이 불행의 지름길이 아니지만,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하지 못한 싱글에게는 비혼이란 인생의 참사에 가깝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여유로움이지만, 자립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버림받음 혹은 뿌리 뽑힘에 가깝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첫 번째 거짓말 속에는 이렇게 생략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화려한 싱글을 주로 내세우는 마케팅 담당자는 독거노인과 노숙자와 같은 완벽하게 혼자 사는 사람들을 생략한다. 또한 ‘결혼은 항상 행복’이라는 거짓말 역시 ‘결혼했지만 불행한 사람 혹은 심지어 결혼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을 생략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이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끝난 불행한 사람도 생략한다. 생략된 대상에는 남편에게 매 맞고 사는 여성도 있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남편도 있다.(28~29p)
최악의 것은 청소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매일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당신이 금요일 날 무엇을 닦아 놓아도 다음 주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 똑같은 먼지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겹지 않겠어요. 최소한 맛이 가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죠. (...) 이건 거의 바다 한복판에서 걸레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96p)
1인 가구는 밖의 경제활동과 안의 가정활동을 관할하는 주체가 동일하다. 1인 가구는 능력 있는 가장이어야 하는 동시에 자애로운 안사람이어야 한다. 연말소득공제 업무를 처리하고 자동차세를 납부하고 가장 경제적인 자동차 보험회사를 찾는 사람과, 마트의 할인 정보를 수집하고 포인트 카드를 챙기고 원플러스원 상품을 찾아내는 사람이 동일하다. 이 식탁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 이 식탁에 올릴 음식을 요리하고, 이 식탁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까지 처리한다. 1인용 테이블에 식사를 제공하는 능력은 TV의 케이블 채널에서 보는 것처럼 멋지게 요리의 레시피를 재현해낼 수 있는 즐거운 능력이 아니다. 이 모든 귀찮은 과정을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자립의 능력이다. 이런 자립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밖에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하더라도 1인용 테이블에는 온갖 배달음식 전단지만 올라갈 뿐이다.(99p)
속설은 속설을 만들었던 조건들이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옛말’이라는 이유나 ‘삶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언급되고 통용된다. 이 시대에 결혼이라는 것은 과연 성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하는 가장 단세포적인 생략법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122p)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는 적은 고통과 권태라는 두 가지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적당히 멀어지게 되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우리의 일생은 거의 이 양자의 중간에서 때로는 강하게 진동하고, 때로는 약하게 진동하고 있는 격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192p)
자기계발서들은 독립과 의존 그 사이에 ‘의지’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돈의 힘을 느낀다. 자유는 의지만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실행되는 순간 자원을 요구한다. 자원 없는 자유의지는 가능태일 뿐이다. 모든 노력에는 자원이 필요하다.(224p)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두려움이 커질 때, 자신이 영원히 젊을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공포로 다가올 때, 가족관계로의 재진입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미혼이라면 뒤늦었지만 가족관계로의 진입을 새삼 고민하고, 이혼 또는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경우라면 가족의 재구성을 심각하게 검토한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사는 사람이 처한 딜레마는 더욱 커진다. 계속 두려움을 가슴 속에 앉고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이 두려움이 어느 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면 정말 탈출구는 짝을 찾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가슴 속에서 어느 순간 켜진 두려움이라는 경고등에도 불구하고 계속 혼자 사는 사람은, 경고등을 무시한 대가로 앞으로 부딪히게 될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두려움이 커질 때 가족으로의 진입은 두려움을 다스리는 훌륭한 처방 같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
가족은 훌륭한 관계를 서로 맺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제도이다. 만약 한 개인이 속한 가족이 형편없는 가족이라면 그 가족은 가장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근심의 기원일 수도 있다. 모든 가족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도 있다. 그러니까 가족으로의 편입이 두려움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 아니 없는 것보다 못한 가족 속에서 억압받으며 억지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개인들이 획득한 정치적 자유가 문화적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혼자일 수 있는 능력이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율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결정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율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만의 치타델레로 못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이 인생 계획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사회가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232~234p)
ㅡ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中, 사월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