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론> 中, 집문당
2016/6/24
무릎을 치는 구절도 있고, 이건 너무 갔다 싶은 주장들도 있으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공부에 힘쓴 철학자의 흥미로운 통찰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모든 소원이 곧 충족된다면 인생의 여백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으며 인간은 무엇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야 하겠는가? 이 인류를 공상의 천국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스스로 잘 성장하고, 종달새가 뭇 사람의 귀에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주고, 저마다 즉석에서 애인을 얻어 손쉽게 동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권태를 느껴 죽어버리든가, 혹은 싸움과 살해를 일삼아 지금보다 더 많은 고뇌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이런 고뇌의 세계가 안성맞춤이며 그 밖의 어떠한 무대나 장소도 적합하지 못하다.(7~8p)
즉, 자연은 개체의 삶과 죽음이 자신에게 하등의 관심이 없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 증거로는 동물이나 인간의 생명을 사소한 우연의 농락에 맡겨 죽은 것을 보고 외눈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신이 걸어가는 길바닥에 벌레가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라. 당신의 발길에 무심코 한 발짝만 어긋나면 그 벌레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보라. 도망갈 수도, 몸을 말을 수도, 그리고 거처를 속일 수도, 숨을 수도 없는 몸으로 모든 강적의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가 움켜잡을 수 있는 개울에서 유유히 꼬리치고 있는 것을 보라. 몸집이 둔하여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두꺼비며, 높은 하늘에서 솔개가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새 새끼며, 산림 속에서 늑대에게 발견된 산양ㅡ이 모든 희생은 연약하고 무기가 없어, 시시로 닥쳐오는 위험을 눈앞에 바라보면서도 무심히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은, 대단히 정교한 피조물인 유기체를 저항할 힘이 없는 알몸으로 내버려둔 채 보다 강한 자의 밥이 될뿐더러 맹목적인 우발사건, 즉 길을 지나가고 있는 바보들이나 아이들의 희롱에 맡겨두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의 이 생물들이 멸망하여도 자기에게는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그 죽음은 자기에게 무의미하여 그 삶이라는 원인도 죽음이라는 결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간명하고도 신성한 언사로 성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기자식을 허다한 위난 앞에 버려 두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죽더라도 자기 품안에 되돌아올 따름이며 그들의 죽음은 당초에 태어난 고장에 되돌아가는 유희, 즉 하나의 조그마한 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동물에 대하여 말한 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즉, 자연의 엄위가 우리에게도 비치고 있으며, 우리의 생사는 자연의 마음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그 때문에 상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실은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13~114p)
모든 욕망은 필요와 결핍과 가난과 괴로움에서 일어난다. 욕망을 충족시키면 그것을 일단 진정시킬 수 있으나,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된 반면에 충족을 느끼지 못하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며 욕구는 무한히 전개되는 반면에 향락은 짧고 적은 분량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켜 쾌락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쾌락은 한낱 외형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그 후에 제2의 쾌락이 대신 나타나면 전자는 소실되어 버리고 후자는 후자대로 환상이 계속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지를 진정시켜 잠재우거나 계속해서 붙잡아 매어 둘 힘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가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도, 거지의 발 아래 던져진 푼돈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목숨에 풀칠을 하여 그 괴로운 생존을 내일까지 연장시킬 따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욕망의 지배와 의지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희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계속해서 안식이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117p)
친구가 많다고 해서 그에게 참된 역량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학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인간이 남의 진가를 인정하고 거기 비례하여 우정을 베푼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발이다. 인간도 또한 개와 마찬가지로 이쪽에서 별로 수고도 하지 않는데 어루만져 주거나 먹다가 남은 뼈다귀라도 던져 주는 자를 따르는 것이다.(162p)
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려면, 그 즐거움보다도 우환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환의 내용이 사소할수록 그가 누리는 행복은 크기 때문이다. 즉, 사소한 일에 대하여 한탄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사소한 걱정은 거들떠볼 경황이 없는 것이다.(259p)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교적인 것은 고독을 감당치 못하여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교와 여행과 구경을 즐기는 것이, 요컨대 내면적인 자아의 공허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 정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신 속에는 자발적인 활동을 할 만한 탄력이 없으므로 술에서 흥분과 자극을 구하여 음주가의 레테르가 붙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구하여, 최대의 자극으로서 자기와 동등한 인간과 접촉하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이 공허하여 자기 자신에게 정떨어진 까닭이다. 그들이 자극을 얻지 못하면 정신은 자체의 중압으로 해서 깊숙이 침몰되어 나중에는 혼미상태에 빠져 버린다. 그들에게는 인간이라는 개념의 적은 분수가 있을 뿐이므로 남들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친분이 뛰어나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있는 사람은, 분수가 아니라 하나의 단위로서 완성되어 있고 충족되어 있다.(273p)
한편 더욱 엄밀히 생각해 보면, 고독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아담에게는 부모가 없었지만, 인간은 적어도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형제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격이라기보다 경험과 사고의 소산으로 정신력의 발달과 상당한 나이를 기다려야 하므로, 사교성은 연령에 반비례한다. 즉, 소년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것이 큰 고통이고, 청년기에는 기꺼이 친구나 동료와 교제하려고 하며(다만 그 중에서 비범한 천성을 지닌 자만이 고독을 구하는데, 그것도 보기 드물며 하루 종일 혼자 있게 되면 이들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장년 이상이 되면 혼자서 곧잘 지내게 된다. 이리하여 고독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 감당할 수 있으며, 늘그막엔 자기도 이미 과거의 골동품으로 인생의 즐거움은 다 누렸다는 마음에서 오히려 고독을 업으로 여기게 된다.(276p)
누구나 자기 이상의 세계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제3자에 대하여 단지 자기가 알 수 있는 면만을 헤아릴 뿐이다. 그러니까 타인에 대한 이해나 인식은 자기 자신의 지능 정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299p)
그리고 인간은 사소한 일에 대하여 조심하지 않으므로 이런 데서 자기의 적나라한 성격을 곧잘 드러낸다. 따라서 남의 입장을 전연 염두에 두지 않는 그들의 철저한 이기주의는 이런 사소한 행위나 거동을 통하여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일에 대한 이기주의는 나중에 큰 일을 처리할 경우에도 나타나며, 이 경우에 다만 그 거죽만이 위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3자의 마음을 간파하려면 먼저 사소한 일에 대한 그들의 거동에 주목하여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자가 ‘법은 사소한 죄를 문책하지 않는다’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 대하여, 파렴치한 행동을 하여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이 이익을 취하거나 공적인 소유를 독점한다면, 그는 정의나 인도를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며, 큰일을 수행할 경우에도 법률이나 권력의 제지를 받지 않는다면 불의와 부정도 얼마든지 저지르는 자로 인정하여 숫제 문전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예컨대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자기 한 몸에 위험이 닥칠 염려가 없으면 국법도 얼마든지 짓밟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306~307p)
ㅡ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론> 中,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