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김영사
2016/9/12
1.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과 무협 소설을 즐겨 읽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외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그 책 중에는 떠올려보면 지금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들과 시간 때우기 용이나 남 앞에 내놓고 얘기하기 부끄러운 책이 있다. ‘이르나크의 장’은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스토리 전개나 같은 사건을 화자를 달리해서 보여주는 구성 같은 것들이 구태의연해 보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어렸던 나에게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냐면 하나의 사건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완전히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는 불가능하고 보는 관점이나 의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지 ‘쌀로 밥 짓는다’는 말 만큼이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역사책 몇 권만 뒤적거려봤어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위의 책으로 비로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게 됐다.
2. 호모 속에 속하는 여러 종 중 멸절하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번성한 것을 넘어 지구의 생태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호모사피엔스의 탄생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를 3개의 핵심적인 사건을 이용하여 큰 시각에서 흥미진진하게 조망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비교적 과학 분야에 치중되어 있으나 거시사를 다루는 측면에서 비슷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보다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성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입에 대한 산출의 비율이 높은 것을 효율이 좋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 한 권을 제대로 소화한다면 여러 권의 책을 읽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가축화된 동물에 대한 견해나 인간이 밀을 필요에 맞게 개량하고 길들인 게 아니라 밀이 자신의 번식을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길들였다는 견해는 마이클 폴란이 쓴 여러 저작물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마이클 폴란이 ‘욕망하는 식물’에서 사과, 감자, 대마초, 튤립 4가지 작물을 통해 인간이 일방적으로 작물을 선택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인간을 길들인다는 주장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한 행복을 논하며 불교사상과 명상기법에 대단히 우호적인 모습이 보였는데 이 모습은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하며, 과거와 비교 했을 때 오늘 날의 평화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분석을 하는 모습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간략하게 요약해놓은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독자들에 따라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단점이라면 자신의 전공분야인 역사에 대한 전문성은 차치하더라도 그걸 제외한 광범위한 학문 분야에 대한 정보의 엄밀성에 의문이 들고, 최대한 중간자적 위치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나 제국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이 좀 걸린다. 본문에서 이런 언급이 있다. “어쨌든 거의 모든 제국은 유혈사태 위에 세워졌고 압제와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은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 유혈사태를 긍정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그들을 부정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체족은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고대 수렵채집인도 마찬가지였다.(89p)
하지만 양치기가 아닌 양 떼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다수의 가축화된 동물에게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들의 진화적 ‘성공’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할 것이다. 만족한 코뿔소는 자신이 자기 종족의 마지막 개체라는 데 아무 불만이 없다. 송아지의 종이 수적으로 성공한 것은 개별 개체들이 겪는 고통에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한다.(147p)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왕궁과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153p)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어떤 바빌론 사람이 이웃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에게 ‘눈에는 눈’ 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모종의 폭력이 필요하다. 1860년 미국인 대다수가 아프리카인 노예 또한 사람이며 자유권을 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남부 주들이 이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치러야만 했다.(167p)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재산을 썼지만, 누구도 바빌론에 쇼핑하러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173p)
편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굳어졌다. 좋은 직업은 모조리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믿기가 쉬워졌다. 평균적인 백인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고, 흑인이 해방된 지도 여러 세대가 지났어. 하지만 교수나 법률가나 의사가 된 흑인이 얼마냐 되냐고. 심지어 은행 출납계원이 된 사람도 드물어. 이건 그들이 지능이 떨어지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흑인들은 악순환에 빠졌다. 그들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미 백인들이 차지해버린 직업을 구할 수 없었는데, 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는 백인들이 차지한 직업을 가진 흑인이 드물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208~209p)
이런 악순환은 수세기 수천 년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질서에 불과한 상상의 위계질서를 지속시킬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의 구분,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만일 브라만이 정말로 수드라보다 더 나은 뇌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는 인도 사회의 곡절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회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211~212p)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였던 45년 내내 모든 의원들은 남자였고, 육군과 해군의 모든 장교는 남자였고, 모든 판사와 변호사, 주교와 대주교, 신학자와 사제는 남자였으며, 모든 의사와 외과의사, 모든 대학과 칼리지의 학생과 교수도 남자였고, 모든 시장과 주 장관, 거의 모든 작가, 건축가, 시인, 철학자, 화가, 음악가, 과학자도 남자였다.(223p)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246~247p)
인도 사람에게 금을 사용할 실용적인 용도가 없더라도, 지중해 사람들이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도 사람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266p)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321p)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338~339p)
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세계 곳곳에 죽음과 압제와 불의를 퍼뜨리는 사악하고 기괴한 집단이었을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백과사전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제국이 사실은 새로운 의학, 더 나은 경제적 형편, 더 큰 안보를 제공해서 피지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런 업적으로 채워진 백과사전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제국들은 과학과 긴밀히 협력했던 덕에 엄청난 힘을 발휘했고 세계를 엄청나게 바꾸어놓았으므로, 이들에게 간단히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제국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했고, 여기에는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과학을 좀 더 사악한 목적에도 사용했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심지어 언어학자들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아마도 의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를 가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느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426~427p)
최근 몇십 년간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 집단에 의해 점점 더 빛을 잃어왔다. 소비자 집단은 서로 직접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비 습관과 관심이 동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 이것은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런 예가 너무나 많다. 가령 마돈나의 팬들도 그런 소비자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들은 주로 구매 패턴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돈나의 공연 티켓, CD, 포스터, 셔츠, 휴대전화 벨소리 음악을 구매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 채식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무엇보다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소비가 그들 정체성의 중추를 이룬다. 독일인 채식주의자는 독일인 육식주의자보다는 프랑스인 채식주의자와 결혼하는 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514~515p)
이런 전쟁이 몇몇 국가들 사이에서 발발한 위험은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과 시리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미국과 이란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법칙을 증명하는 예외일 뿐이다. 물론 미래에는 규칙이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세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순진함 자체가 더없이 매혹적이다. 평화가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서 사람들이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는 과거에는 달리 없었다.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벌이고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526~529p)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내세의 의미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의미보다 더 심한 망상이 아니었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어떤 병사는 자신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고, 어느 기업가는 새로 회사를 세우는 데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들이 찾는 의미가 중세 사람들이 경전을 읽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 데서 찾았던 의미보다 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552~553p)
ㅡ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