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스티븐 핑커, <빈 서판> 中, 사이언스북스

mediokrity 2016. 9. 30. 00:42

2016/9/29

 

 

2001년 유럽연합(EU)의 한 보고서는 15년에 걸친 81건의 조사 프로젝트를 검토한 결과 유전자 조작 곡물이 인간의 건강과 환경에 새로운 위험을 가한다는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생물학자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은 결코 자연식품보다 위험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연 식품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 식품점에서 판매하는 거의 모든 동물과 야채는 수천 년 동안 선택적인 품종 개량과 이종 교배를 통해 유전적으로 조작된것들이다. 야생에서 자라던 당근의 조상은 가늘고 쓴맛이 나는 흰색 뿌리였다. 옥수수의 조상은 쉽게 부서지는 속에 돌처럼 단단하고 작은 낱알 몇 개가 붙어 있던 1인치 길이의 보잘것없는 품종이었다.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식물들은 먹히겠다는 특별한 욕구를 갖지 않은 생물이어서 맛있다거나 건강에 좋다거나 인간이 재배해서 수확하기 쉬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에게 먹히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극물, 독성, 쓴맛이 아는 성분 등을 진화시켰다. 따라서 자연 식품이라고 해서 특별히 안전한 점은 없다. 유해물에 저항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교배하는 자연의 방법은 식물의 독성 농도를 증가시키기만 한다. 자연 감자의 한 품종은 인간에게 해로운 독성이 발견되어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천연 향료한 식품 과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구시대 기술로 얻어낸 향료도 화학적으로 인공 감미료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구별이 가능할 때에도 때로는 천연 향료가 더 위험하다. “천연아몬드 향료인 벤즈알데히드를 복숭아 씨에서 추출하면 시안화물이 함께 나오지만, 그것을 합성해 인공 감미료를 만들면 그렇지 않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의 측면에서 보자면 명백히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식품 가격을 더욱 올려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

이렇게 볼 때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에는 어떤 본질이 있다는 표준적인 직관에 불과하다. 자연 식품에는 그 식물이나 동물의 순수한 본질이 있고 그와 함께 그것이 성장한 시골 환경의 건강한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인공 첨가제를 함유한 식품은 역한 실험실이나 공장에서 만든 오염 물질이 의도적으로 첨부된 식품이라 생각한다. 유전학, 생화학, 진화, 위험 분석 등에 의존해서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제기해도 이 뿌리깊은 사고 방식 앞에서는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404~407p)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저능아라거나 전문가들이 복잡한 기술적인 용어를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을 완전히 이해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조차도 진보한 기술을 외면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본능적으로 역겹다고 느껴지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자신의 심리적 기준에 따라 거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위생적으로 복원된 쓰레기장에서 재배한 야채를 거부하고 바닥이 유리로 된 승강기를 피하는 것은, 그것이 위험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거나 원자력 발전소 옆에서 사는 것에 대해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비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려고 하지 않는 한, 그런 것을 거부할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409p)

 

 

자연은 교수형을 좋아하는 재판관이라는 속담이 있다. 수많은 비극이 우리의 신체적인지적 본질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몸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물질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못될 경우는 수없이 많고 잘될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틀림없이 죽고, 또 그 사실을 알 정도로 영리하다. 우리의 마음은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 맞추어지고, 지독한 교육에 의해서만 바로잡을 수 있는 오류에 잘 빠지고,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의문에 사로잡혀 속이 썩는다.(424p)

 

 

부모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아첨을 하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도 아이들의 성격은 절대로 부모의 의도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어린이에 관한 장에서 보겠지만, 동일 문화권이란 조건에서 한 쌍의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작다. 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성격 차는 태어날 때부터 떨어져 자란 아이들의 성격 차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 입양된 아이들은 서로 너무 다르게 자라나서, 오히려 생면부지의 사람과 더 비슷할 정도이다.

(...)

아이들이 부모의 뜻대로 크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모 노릇을 하면서 직접 알게되는 씁쓸한 교훈 중 하나이다.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자식은 우리의 자식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생각을 줄 수는 없다. 아이들에겐 그들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437p)

 

 

 

스티븐 핑커, <빈 서판> , 사이언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