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알베르 카뮈, <페스트> 中, 민음사

mediokrity 2016. 10. 22. 01:33

2016/10/22

 

 

그랑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경우가 다 그렇다. 즉 결혼하고, 계속해서 또 조금 사랑하고 일을 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일을 한다. 잔도 일을 해야만 했다. 국장이 그랑에게 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목에서 그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했다. 피로해진 탓도 있고 해서 그는 무심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더 말이 적어졌으며, 젊은 아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서서히 막혀 가는 장래, 식탁에 앉아도 할 말이 없는 저녁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적 사랑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 필시 잔은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여자는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통을 고통인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이 사람에겐 흔히 있는 법이니 말이다. 몇 해가 지났다. 그 후 그 여자는 떠나고 말았다. 물론 그 여자가 혼자서 떠나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을 무첫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나도 피곤해요. 떠나는 것이 기쁘지는 않아요. 꼭 기뻐야만 새 출발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것이 대략, 그 여자가 그랑에게 써 보낸 편지의 내용이었다.(112p)

 

나는 그 호의적인 열정을 이해한다. 재앙이 시작될 때와 그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으레 약간의 수사를 농하는 법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아직 습관을 털어 버리지 못해서 그렇고 후자의 경우에는 습관이 이미 회복 되어서 그렇다. 불행의 순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해진다.’(156~157p)

 

초기에 그들이 이번 질병도 딴 질병이나 다름없는 흔한 것이리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종교도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향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낮에 사람들 얼굴에 그려져 있던 그 모든 고뇌는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 녘이 되면 일종의 흉포한 흥분이나 모든 시민을 열에 들뜨게 하는 서투른 자유로 낙착되고 만다.(162~163p)

 

그러나 서술자는 차라리 훌륭한 행동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 힘에 대해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인간 행위에 있어서 악의와 무관심이 훨씬 더 빈번하게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176~177p)

 

같은 시내에서도 특히 피해가 심한 구역을 격리하고 직무상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외에는 외출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조치가 유난스럽게 자기네들에게만 불리하게 취해진 일종의 약자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과 비교해 보면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마치 무슨 자유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곤란한 순간에 부닥쳐도,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네들보다 덜 자유롭다는 것을 상상하고는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223p)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236p)

 

 

 

 

알베르 카뮈, <페스트> ,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