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中, 책세상
2016/10/31
각 시대는 수많은 의견을 잉태하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판명 나는 경우도 많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46-47p)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잘못된 판단을 시정할 수단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 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에 명확하게 맞설 수 있는 모든 의견들에 대해 소상하게 잘 파악하고 이런저런 반박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ㅡ즉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청해 나서고,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을 봉쇄하지 않는 사람ㅡ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50-51p)
적군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공부를 집어치우고 낮잠이나 자러 가게 마련이다.(86p)
우리는 지금까지 네 가지 분명한 이유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정신적 복리는 다른 모든 복리의 기초가 된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든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어렵고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진리의 합리적 근거를 그다지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편견과 같은 것으로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로,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되거나 퇴색되면서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을 위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의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면서,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그 어떤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102-103p)
그러나 지금까지 예를 든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더 결정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촉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을 포함한 다른 자유 국가에서 여론이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히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특별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특별함 때문에 다수 대중의 생각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중들도 나름대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확산되면서 정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대중의 의지에 맞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통념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회적 후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중이 수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항하면서 대중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이나 경향을 지키려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들이 서로 합쳐져서 개별성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개별성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대중보다 앞서 있는 지식인들이 개별성의 중요성, 즉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이 비록 상황을 낫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ㅡ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ㅡ그래도 다들 똑같은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사람들을 아직 완벽하게 하나로 묶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별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초기가 지나면 병을 확실히 고치기 어려운 법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그 병을 키우는 뿌리이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138-139p)
ㅡ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中,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