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 中, 창비
mediokrity
2016. 11. 7. 09:22
2016/11/6
앎이나 깨달음은 늘 그렇게, 한발짝 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똑같은 거리가 등하교 때마다 오분가량 차이나듯, 그녀가 아무리 아등바등 따라잡으려 해도 삶과 그녀의 박자도 그렇게 어긋났다.(19p)
나는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이다. 물론 내가 남들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좋은 벗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덕목이랄 수 있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고 자위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눈은 다락같이 높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자의 외로움을 견딜 줄 안다는 뜻이다. 그렇듯 하는 일이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 빤하고 투명한 삶을 살았는데도 내 서른 즈음이 그녀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못했다는 건 차라리 경이롭다.(44-45p)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리라는 생각, 그 사람의 눈앞에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리라는 편견은 참으로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살아갈 날이 충분할 때에만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했다. 미래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나 기억도 적었다. 상욱이 이제껏 지켜봐온 노인이나 폐인 들은 집요하게 현재적이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그들은 현재에만, 오직 찰나에만 집착했다.(102p)
ㅡ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