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中, 자음과모음

mediokrity 2016. 11. 11. 16:57

2016/11/11

2019/1/10 

 

다시 읽어도 첫째 밤의 얘기가 가장 좋았다.

 

 

나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고 꼴불견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정보를 차단하여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서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리석음을 선택했습니다. 무지를. 이것은 꽤 짊어지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정보가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보다 힘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대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면 그 질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고 무엇보다 먼저 정보통이 되려고 합니다. 게다가 정보를 무시하는 척하기 위해서 말이지요.(19p)

 

 

즉 대학의 교양학부 커리큘럼이 가장 빈곤한 의미에서의 비평가를 낳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속하는 지인이나 친구가 많았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무척 기묘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화요일에 영국 낭만주의 시에 대해 발표해야 합니다. 다음 날에는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에 대해 발표해야 합니다. 목요일에는 석사 논문 수업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프랑스 현대사상, 예를 들면 레비나스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독일 현대 건축에 대해 토론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무엇이 단련되겠습니까? ‘모든것에 대해 조금은 재치 있는 말 한마디를 해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눈을 칩떠 사방을 잘 둘러보는 것만을 연마할 뿐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곳은 축소 재생산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들 희희낙락하며 쇠약해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쭐해하며 떠들면서 뭔가 깊은 불안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도저히 진심으로 세계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이것이 제가 속해 있던 짧은 시대, 그리고 좁은 장소에 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것들, 모든 것에 대해 그거야 알고 있지. 이러이러한 거잖아, 그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에 의해 메타 레벨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사상이나 비평이라 불린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무척 기묘한 일입니다. 사상이나 비평이라는 좁은 원에서 한 발짝만 바깥으로 나가면 모든 것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그런 자아를 추구하고자 하는 환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제 친구였던 화가들, 댄서들, 기타리스트들, 피아니스트들, 가수들, 래퍼들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20-21p)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 지식과 정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고, 매일 최신의 정보로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겁에 질린 강박관념에는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22p)

 

 

사상, 비평, 학문, 지식이나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분야에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쪽을 비평가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을 전문가라고 부릅시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은’,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실 그것은 과격하게 보이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는, 방종한 안일함에 푹 빠진 향락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23-24p)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니체를 인용할까요.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다들 읽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겁니다. 필터를 끼워 정보로 환원된 것만 상대하면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라면 한 번 읽으면 됩니다. 또는 저장해두고 검색기만 돌리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말한 의미에서 읽는다는 것을 행사하려고 하면 그렇게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40-42p)

 

 

책이라는 것은 한 장의 종이를 여러 번 접고 재단하여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접어 이 되면, 급하게 한 장의 종이로 만든 문서나 두 장으로 접어서 펼친 서류와 달리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몇 번 읽어도, 몇 번 눈을 집중해도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확신이 별안간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신기한 일입니다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79p)

 

 

이런 표현을 해봅시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종교 법 인인 것에 안심하고 인가를 받아 세제상의 우대 조치라는 은혜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120-121p)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잃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153p)

 

 

완전히 병들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읽을 수 없는 읽는다는 고난과는 반대인 어차피 읽히는, 읽히는 것밖에 읽지 않는, 읽지 않아도 이미 안다며 얕보고 읽지 않는 안일함이 죽음을, 한없는 죽음을 낳는 것입니다. 루터나 무함마드와 달리 아무것도 낳지 않는,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그저 무익한 대량의 죽음을 말이지요.(157p)

  

 

조금은 자신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참하며 조악한 사고의 형태에 알랑거리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으면 합니다.(162p)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271p)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자음과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