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이혁진, <누운 배> 中, 한겨레출판

mediokrity 2016. 11. 22. 13:01

2016/11/22

 

 

 

결국 부서에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서류란 서류 자체의 필요, 불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서장의 입맛과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부서장이 자주 들춰보는 것들만 서류로 남아 있다 보니 불출 대장처럼 매일 쓰는 기초 자료는 엉성하거나 아예 없는 곳이 허다했고 공정 진도율처럼 고급 자료 역시 부서에서 작업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것, 부서의 담당 임원이 사용하는 것, 그 자료를 모두 취합해 주간 공정 회의에서 보고하는 생산관리 팀에서 사용하는 것이 제각각이었다.(32p)

 

 

회사란 집단이 원래 포기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돈이 나가도 내 돈이 아니고 책임을 져도 나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니까요.

(...)

잘 생각해보십시오. 책임은 나중 일이고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또 나중에 책임을 지더라도 그때는 자기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자기 위 지사장까지, 조직 전체가 나눠 지는 겁니다. 뭐하러 지점장이 긁어 부스럼 만들겠습니까? 이래서 내가 회사란 포기가 빠른 집단이라고 말한 겁니다.(43-44p)

 

 

이것으로 나도 회장의 줄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안심이 됐다. 그 힘, 눈먼 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경멸했지만 두려워했고 혐오했지만 동경했다. 팀장과 팀이 그렇게 된 것은 슬프고 갑갑했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나는 두 겹으로 나뉘어 있었다. 힘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그렇게 되기 마련 아닐까? 갇힌 기분은 들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견디고 버티는 회사 생활, 그것밖에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는 도망쳐왔다. 도망친 곳에 자유가 있을 리 없다고 말들 하지 않는가? 실은 도망쳐온 것조차 아닐지 몰랐다. 상관없었다.(141p)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늙은이들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연급 받듯 월급을 받으려 들고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되려 분노하고, 두려움으로 주름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원칙을 뭉개고 규칙을 악용하며 쥐어짤 수 있는 것을 모두 쥐어짜 단 즙만 빨아먹으려고 하는 거라고. 또 젊은이들은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남들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한 기대와 희망을 인생이 주는 진짜 꿈이라는 걸 잃어버린 채 어서 편해지기를, 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의 높은 연봉과 권세를 부러워하며 쾌락을 보상이 아닌 목적으로,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닌 근거로 삼은 채 어서 늙어가기만을 바라느라 인생의 금화 같은 젊음을 지폐 몇 장에 너무나 쉽게 바꿔버리는 거라고 말입니다.

(...)

사장실을 나서기 전, 나는 황사장에게 왜 불쑥 자기 얘기를 했는지 묻고 싶었으나 짬을 찾지 못했다. 인생의 많은 순간처럼, 그 순간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278-230p)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286p)

 

 

그래서 가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도 가야 하기도 했고 어쨌든 가야 했다.(293-294p)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는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운과 능력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지위와 권세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 사장은 어떤가? 불굴의 투사, 불요의 혁신가는? 결국 싸움에서, 이 끝없는 전쟁에서 내쫓기고 내쫓겨 패배하고 실패한 것이 황 사장의 종말이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할 따름이고 그 허무야말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중량이었다.(301-302p)

 

 

회사가 그저 월급이나 주고 괴롭기만 한 곳처럼 말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붙박여 있는 곳에서 푼돈에 그저 인생을 끊어 파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 정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할까?(320p)

 

 

 

ㅡ 이혁진, <누운 배>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