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밀란 쿤데라, <커튼> 中, 민음사

mediokrity 2016. 12. 12. 15:20

2016/12/11

 

 

현실을 주의 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비상식적이고, 따라서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비개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 세상에 대한 이 길고 게걸스러운 시선이 바로 카프카와 그 후의 다른 위대한 소설가들을 개연성의 국경 너머로 이끈 것이다.(103p)

 

 

어리석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성은 그럴듯한 거짓말 뒤에 숨어 있는 악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에 직면할 때 이성은 속수무책이다. 폭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리석음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결백하다. 솔직하다. 벌거벗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다. (...) 털끝만 한 의심도 없이, 털끝만 한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사상을 고수할 힘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어리석음 아닐까? 대리석에 조각된 듯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어리석음 아닐까?(180p)

 

 

자유의 개념. 측량사 K에게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모든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자기의 환경, 자기 집 밑에 지어진 주차장과 창문 바로 맞은편에서 웅웅거리는 확성기를 과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아 파산하게 된 프랑스인 소기업가의 평범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나가 변호하려고 하다가 곧 포기하고 만다. 그의 사건이 해결되려면 4년은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소송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상인 블로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송은 아무런 판결 없이 5년 반 동안 질질 끌려다닌다. 그사이에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위해서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측량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187-189p)

 

 

위대한 소설가의 주검 위에 오줌을 갈긴다고 해서 이 젊은 시인들이 진정한, 경탄할 만한 시인들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천재성과 어리석음은 같은 샘에서 뿜어져 나온다. 과거에 대해서 난폭하게(격정적으로) 공격적인 만큼, 즐거운 집단 오줌 누기로 축복하며 스스로 그 위임자가 된 듯이 여기는 미래에 대해서도 똑같이 난폭하게(격정적으로) 헌신한다.(196p)

 

 

누구나 이와 같은 일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화 도중 당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도 당신은 그게 자신이 했던 말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한 말들은 아주 좋은 경우라면 거칠게 단순화되거나, 때로는 (사람들이 당신이 한 조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왜곡되기도 하고, 아주 빈번한 경우에는 당신이 말했을 법한 혹은 생각했을 법한 것과는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놀라거나 화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명한 이치 중에서도 자명한 이치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바로 작동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지우는) 망각의 힘과 (변형시키는) 기억의 힘이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과거(단 몇 초 후의 과거일지라도)와 단절되기 마련이니까.(202-203p)

 

 

그런데도 예술에 대한 인식 역시 망각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은 망각에 직면하여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시는 특권을 누린다. 보들레르의 소네트 한 편을 읽는 사람은 거기서 단 한 자도 건너뛰고 읽을 수 없다. 그가 그 소네트를 좋아한다면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을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큰 소리로 말이다. 그가 그 소네트에 정신 없이 빠져 든다면 소네트를 암송할 것이다. 서정시는 기억의 성채다.

이와 반대로 소설은 망각에 직면하여 별 힘을 못 쓰는 견고하지 못한 빈약한 성이다. 만일 내가 스무 쪽을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사백 쪽 분량의 소설을 읽으려면 스무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럼 보자, 일주일이 걸리는 셈이다. 일주일 내내 소설책만 읽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책을 읽는 중 며칠은 책을 펴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게 마련인데, 바로 그 공백의 시간에 망각이 곧장 껴들어 와 작업을 개시한다. 그렇다고 망각이 꼭 독서를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망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끼어든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나는 방금 읽은 부분을 그새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전 이야기의 일종의 개요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세밀한 묘사, 자잘한 관찰, 경탄해 마지않는 형식들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독서로 얻은 몇몇 기억의 파편들로 각자 아주 다른 책 두 권을 만들어 버리고 만 우리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204-205p)

 

 

어느 날 소설의 역사가 끝이 난다면 끝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위대한 소설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떤 소설들(「팡타그뤼엘」, 「트리스트럼 섄디」, 「운명론자 자크」, 「율리시스」와 같은 소설들)은 줄거리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고, 또 그런 이유로 각색도 안 된다. 이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소설들(「안나 카레니나」, 「백치」, 「소송」과 같은 소설들)은 품고 있는 ‘스토리’덕택에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듯이 보이므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만화로 각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멸’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화려한 무덤을 만들 뿐이다. 그 무덤의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211-212p)

 

 

 

ㅡ 밀란 쿤데라, <커튼>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