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中, 문학과지성사

mediokrity 2016. 12. 14. 15:56

2016/12/14

 

 

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우파에게 유머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을 웃기는 데는 선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 모르죠.(32p)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34p)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약속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고 언제나 덮을 수 있다. 나는 책을 한 번에 세 페이지 이상 읽는 일이 드물다. 좋은 책은 대부분 세 페이지 안에 좋은 부분이 나온다. 또는 세 페이지 안에서 좋음을 얻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서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좋지 않은 책은 세 페이지가 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책과 달리 영화와 공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으로 가야 하며, 표를 끊고(심지어 대부분 예매를 해야 한다!) 줄을 서서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작품을 관람한다. 이런 특성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고, 최근에는 참지 않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지난 시대에 비디오가 나왔고, 지금은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루에 십 수 편의 영화를 보는데, 한 영화당 짧게는 30초, 길어도 10분 이상 보는 일이 드물다. 나는 서재에서 책을 꺼내 보듯 하드에 담긴 영화를 보며 영화를 보다가 다른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면 그곳으로 옮겨간다. 좋은 부분이 느껴지면 플레이를 정지하고 방 안에 잠시 서 있거나 귤을 꺼내 손 위에서 가지고 논다. 어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도 임의로 작품을 펼쳐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보길 바란다. 나는 그런 태도가 강하게 배어나는 작품일수록 지루함을 느낀다. 책은 내 손안에 있다. 나는 언제든 책을 열거나 덮을 수 있고, 책 역시 언제나 내게서 달아날 수 있다.(125-126p)

 

 

나는 여행을 잘 가지 않는데 누군가와 여행을 갔다 오면, 그 뒤로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더욱 갈 일이 없는데, 내게는 이곳과 저곳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또한 멀리 가면 피곤함을 느끼고 피곤함을 느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늘 가까운 곳만 가는 편이며 어딜 가든 곧 돌아오곤 했다.(137-138p)

 

 

영화는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입니다. 무슨 말이야. 나는 이것도 책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부르주아적인 쓰레기에 대한 말이야? 아니. 나는 이건 삶에 대한 말이라고 했다. 삶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고 고다르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과 차이가 없고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현실이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영화라면 삶이 곧 그 어떤 이미지라고 말했다. 친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자신이 왜 책을 읽지 않거나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너를 보면 알겠다고 말했다.(144p)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자신이 생각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님을 깨닫지 않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장 왜곡된 형태의 나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했다.(206p)

 

 

케이프타운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대부분의 사람이 총을 들고 다니며 수틀리면 총질을 하고 도적질을 하는 곳인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자신은 이미 애틀랜타의 현대건설 지점에서 일할 당시 살던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흑인에 의해 강도질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 자신의 등에 권총으로 생각할 만한 차가운 금속 물체가 닿았다며 총이 몸에 닿는 것을 상상해보았는지 자신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고 혹시 이 멍청한 새끼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얘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어차피 나는 죽는 거지만 죽일 생각도 없는데 오발 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떡하나, 총은 생각이 없고 총은 의지가 없고 총은 실수와 의지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기계니까 이 새끼가 내 지갑을 받아 들다가 아이코 이러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오금이 저렸다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고, 그러니까 너도 케이프타운에 올 거면 각오하라고, 너는 의도적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실수로 죽을 수도 있다고, 꽃가루처럼 날아든 총알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는 재경에게 비명횡사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고 케이프타운에 가고 싶다고 답했지만 어쩌면 한 번도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223p)

 

 

 

ㅡ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中,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