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 中, 열린책들
2017/1/9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 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말이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길 바란다.
이제 절망하는 독자를 생각해 보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문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을 독자를. 여러분에게 무엇이 보이나? 첫째, 절망하는 이들은 젊은 독자, 혹은 잔뜩 예민해진 성숙하지 못한 성인, 비겁한 성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자살하는 전형적인 머저리(표현이 뭐하지만)라는 말이다. 둘째, 그들은 한계가 있는 독자이다. 왜 한계가 있느냐고? 간단하다. 그게 그거지만 절망의 문학 혹은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밖에 못 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마의 산”(이 작품은 내 보잘것없는 견해로는 조용한 문학, 차분한 문학, 완벽한 문학의 패러다임이다)을 단숨에 못 읽는 자 혹은 태아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레 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내 이야기가 꽤 명쾌하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명쾌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말하고, 경고하고, 그들이 직면할 위험을 대비시켰다. 돌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절망하는 독자들은 캘리포니아 금광과 마찬가지이다. 머잖아 고갈된다! 왜냐고?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더구나 시를 읽는 절망하는 독자는 더 견딜 수 없다. 내 말을 믿어라)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그러면 절망적인 독자는 갱생 과정의 일환으로 천천히(강보에 쌓인 아이처럼, 신경 안정제가 녹아 만들어진 비를 맞으면서) 차분한 독자, 휴식하는 독자들을 위한 문학에 집중 가능한 정신 상태로 돌아온다. 그것을 사춘기에서 성인으로의 이행이라고 부른다(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나>라도 그렇게 부르련다). 그러나 평온한 독자가 되었다고 해서 절망하는 독자를 위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히 그런 책도 읽는다! 특히 그 책이 훌륭하거나 괜찮으면, 아니면 친구가 추천했다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겨워진다! 무기나 처형당한 메시아가 난무하는 그 씁쓸한 문학은 궁극적으로 평온한 독자의 심장을 파고들지 못한다. 차분한 페이지, 성찰이 있는 페이지, 기법상 완벽한 페이지와는 달리. 나는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경고를 했다. 기법상 완벽한 페이지를 가르쳐 주었다. 위험에 대해 알려 주었다.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그러나 나는 미쳐 있었다. 딸들 잘못으로, 그들의 잘못으로, 라우라 다미안의 잘못으로 미쳐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321-323p)
나는 생물학자가 되면 시간이 있고 돈도 있을 거라고, 그 도시들과 나라들을 보고자 히치하이킹을 하고 아무 데서나 자면서 세계를 돌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도시들과 나라들을 <볼> 생각이 아니라 <살아 볼> 생각이야. 멕시코에서 살았던 것처럼. 내가 말했다. 잘 살아 봐, 네가 원한다면 그런 곳들에서 살다 죽으라고. 나는 돈 생기면 그때 여행을 할 테니. 그가 말했다. 그때가 되면 시간이 없을걸. 내가 말했다. 없지 않을 거야. 도리어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 될 거야. 내 시간을 이용해 하고 싶은 것만 할 거야.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때는 젊지 않겠지. 아르투로는 그 말을 하면서 거의 울려고 했다.(337-338p)
ㅡ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 中,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