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中, 흐름출판

mediokrity 2017. 1. 16. 16:22

2017/1/16

 

 

죽음은 항상 관심이 있는 주제이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를 다닐 무렵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를 대충 훑어보다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라도 생각을 해봤다. 당연히 깊지는 않았고 그 후 오랫동안 별 생각이 없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문득 이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행위가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죽으면 다 사라질 텐데’. 빈번하게 드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날은 힘이 빠지고 무서웠다. 마음가짐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달라진 건 있다.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런 생각이 불현듯 다가와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인정한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는다. 성을 금기시 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쉬쉬하며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좀 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한국정서상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가족들 사이에서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직업적인 마인드로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글쓴이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소명의식에 온전히 동의가 되지 않아서 생각보다는 덜 좋았다. 내가 만약 죽음에 대한 책을 추천한다면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나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 위의 2권이 죽어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낀 지점들을 풀어낸 책이라면,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직접 죽음과 마주하며 쓴 책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적어나가는 글이 인상적이다.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로서 내가 꿈꾸었던 가장 높은 이상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환자가 치명적인 두부 출혈로 병원에 들어올 때, 신경외과의와 나누는 첫 대화는 환자의 가족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환자를 평화롭게 보내줄 수도 있고(“천명이 다해서 떠난거야”), 아니면 결코 아물지 않는 회한으로 남을 수도 있다(“그 의사들은 우리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 그 아이를 구하려는 시늉조차 안 했다고!”).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뿐이다.(112p)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 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뜻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때로는 그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파가 일시 중단되며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인성증후군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경험하기도 하는 졸도의 심각한 형태이다.(116p)

 

 

수술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번엔 화학 요법, 방사선 치료, 예후에 관해 의논했다. 이 즈음 내가 이미 체득한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었다. 첫째, 상세한 통계 자료는 학술회의에나 어울리지 병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권위 있는 통계인 카플란 마이어 생존분석 곡선은 시간 경과에 따른 생존 환자의 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분석을 척도로 삼아 병의 진행을 판단하고 병의 경중을 이해한다. 아교모세포종의 경우 생존 곡선이 급격히 떨어져 환자가 2년 후까지 생존하는 경우는 약 5퍼센트에 불과하다. 둘째,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평균 생존 기간은 11개월입니다’, ‘2년 안에 사망 할 가능성이 95퍼센트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대다수 환자가 수개월부터 2~3년까지 생존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다. 문제는 환자가 곡선의 어디에 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환자는 6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아니면 60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는 의사들이 있는데(“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6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그런 수치를 가르쳐 주는 건지 나는 너무나 의아했다.(121-122p)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161p)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193p)

 

 

물론 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현실을 생각하면 맹목적인 결정론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계시가 인식론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성적인 사람들이며, 계시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설사 신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망상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자의 뜻을 품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거의 그렇다.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되 거기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혹은 가능하다 해도 확실히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203-205p)

 

 

다시 한 번 나는 의사에서 환자로, 주체에서 객체로, 주어에서 직접 목적어로 돌아왔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내 삶은 내 선택들이 쭉 이어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적 서사에서 한 인물의 운명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리어 왕>의 글로스터는 인간의 운명이 제멋대로인 아이들 손에 맡겨진 파리같다고 불평하지만, 실제 그 희곡의 극적 구조를 만들어주는 건 리어 왕의 허영심이다. 계몽운동 이후 개인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간의 행동이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그리스 비극과 더 닮은, 오래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부모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에 접근하려면 신성한 환상을 보는 예언자들을 통하거나 신탁을 받아야 한다. 내가 에마를 보러 온 이유는 치료 계획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받게 될 의학적인 조치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신탁과도 같은 지혜의 말을 듣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213-214p)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 흐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