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석영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中, 예담
2017/4/27
남녀 관계는 논리로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톨스토이 같은 지적인 남자가 일자무식 아낙과 몇 년씩 뒤엉켜 살면서 일생일대의 사랑 어쩌고 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톨스토이에게 남녀의 사랑이란 어느 수준에서는 전적으로 육체의 사랑이었다는 이야기다. 복잡할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같이 자는 것, 이게 사랑이란다.
둘째,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그게 사랑의 전부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자꾸 속살거린다. 이때부터 만사가 복잡해진다. 육체의 결합 이상의 것을 사랑에서 찾아내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육체의 쾌락에 덧붙여 영혼의 교감, 의사소통, 이런 것들을 결혼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나중에 더욱 소상히 밝히겠지만 결혼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육체관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훗날 톨스토이는 이를 갈며 뇌까린다. “결혼은 합법적인 매춘이다.”
셋째, 거기에 덧붙여 도덕이라는 것이 개입하게 되면 이제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된다. 톨스토이는 농부 아낙과의 질펀한 관계를 비롯해 모든 육체관계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 도덕의 칼을 갈았다. 톨스토이가 육체를 혐오하다 보니 도덕가가 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도덕가이기 때문에 육체를 혐오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좌우간 육체 및 육체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정상치를 훌쩍 뛰어넘는다.(48-49p)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는 내 모든 것이야!’ ‘너는 내 운명이야!’ 사랑에 빠진 남녀가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노래에도 나오고 소설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온다. 절절하게 들린다.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조금 뿌듯한 기분까지 들 것 같다. 그러나 『안나 카레리나』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안나의 전폭적인 사랑 선언은 곧바로 상대방을 질리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의 파멸을 가져온다.
안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는 내 모든 것’ 시나리오는 우선 남편과 자식을 버리기로 한 자기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는 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도덕이고 뭐고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 즉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만일 안나가 그냥 사랑에 목숨 거는 데 만족했다면 별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무언가에 목숨을 걸었으면 응당 대가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상대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생각 자체가 무서운 것이다(무언가를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좌우간 문제가 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에서는 상대방에게서도 꼭 그만큼의 목숨 건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은 나처럼 그렇게 헌신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한테는 네가 전부인데 너한테는 내가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생각은 곧 근거 없는 의심과 질투로 발전해 나간다. 안나는 이런 고전적인 심리적 동요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는다.(58-59p)
그는 최근 와서 점점 더 빈번히 그녀에게 일어나는 질투의 발작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질투의 원인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식어가는 자기감정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의 사랑은 행복이라고 자신이게 말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안나는 인생의 모든 행복보다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숨 막히게 하고 그로 하여금 역겨운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압도적인 사랑이다. 그녀는 외모까지도 어딘지 모르게 추하게 변해가는 듯하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그만 그것을 따서 쓸모없게 만들어 놓고는 시든 꽃에서 이전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애정이 가장 뜨거웠던 무렵에는 만일 강렬하게 원한다면 가슴 속에서 그 사랑을 뽑아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도리어 그녀와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61-62p)
그럼 여기서 대충 정리해 보자. 톨스토이 부부의 갈등은 처음부터 톨스토이 자신에게서 촉발됐다. 그는 매우 복잡한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육체와의 전쟁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정을 이루어 육체의 행복을 누리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욕심도 많은 사람이어서 항상 완벽한 아내, 완벽한 결혼에 대한 이상(혹은 망상)을 품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이상적인 부인은 정숙하고 머리도 좋고 순결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남편에게 순종적이면서도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이해심으로 충만해 있고,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여자였다. 때에 따라서는 남편과 더불어 인생철학을 논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이면서 또 어떤 때는 농사꾼 아낙네처럼 순박함 그 자체인 여자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였다.(98p)
ㅡ 석영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中, 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