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혜리, <영화야 미안해> 中, 강
2017/5/30
「룩 앳 미」는 권력의 파괴적 효과를 말하기 위해 비리와 이권, 이전투구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아부와 차별을 그릴 필요도 못 느낀다. 현명하게도 「룩 앳 미」는 권력의 효과를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인내와 관용의 정도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권력은 나쁜 취향의 농담에 무골충처럼 웃게 하는 힘이다. 토끼고기를 싫어하는 피에르를 에티엔이 지정한 메뉴에 동의하게 만드는 힘이며, 오랜 친구가 에티엔이 두고 온 와인을 가져오겠다고 두 시간의 운전을 기꺼이 떠맡게 만드는 힘이다. 이 모든 것은 굴종이 아니라 ‘친절’과 ‘예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기에 교묘하다. 반면 더 이상 얻을 게 없는 친구의 약점에 대하나 관용은 자꾸만 얇아진다. 허술한 기억력도 엄살떠는 습관도 참을 수 없는 단점이 된다.(127p)
영화 속의 삼십대 남녀에게는 연애 말고도 잡다한 골칫거리가 있다. 그들은 때로 자기가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문제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다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홀로 잠든다. 그러나 이 덜 섹시한 삼십대 남녀들의 연애담은 이상하게도 번번이 전세계 로맨틱코미디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이유는 아마 러브스토리에 대한 갈증으로 멜로드라마의 티켓을 사고 스릴에 대한 갈증으로 스릴러를 찾으면서도, 좋은 로맨스영화는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을, 좋은 호러는 공포 이외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발견하는 우리의 경험과 통해 있을 것이다.(201-202p)
결혼에 대한 나의 이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가다. 아내와 서로 피해 다니기 충분할 만큼 널찍한 성에 살면서 아이들은 유모가 말끔히 거두고 저녁이면 세일러복을 입혀 (기왕이면 계단에서) 사열한 뒤 잠자리로 보내면 되는. 하지만 내가 현실의 좁은 집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어질러진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는 건 싫다. 그나저나 장난감들의 원색은 정말 눈에 거슬린다. 이기적이라고? 나도 안다.(341p)
초기작 「사이렌」의 존 듀이건 감독은 “휴 그랜트가 지닌 최고의 상업성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휴 그랜트는 귀공자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겪은 우스꽝스러운 망신이나 진짜 명예와 무관한 사소한 모욕의 경험(국제영화제에서 바지 지퍼를 연 채 기립박수에 화답했다든가 하는)을 화제로 삼는다. 삶에서 정말 정색하고 엄숙히 취급해야 할 문제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고 말하듯이.(342p)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는지 한계를 자연히 알게 된다.” 그렇게 직업적 야심이 소박해서 좋은 배우가 되겠냐고 혀를 차면 그랜트는 이렇게 응수한다. “수많은 인간이 타고난 소명이 아닌 일로 먹고살지만,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때로는 제법 능숙해지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도 특별히 카펫을 사랑하진 않으셨지만 팔아치우는 데에는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셨다.(343p)
“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애정을 퍼부었다. 넉넉히 사랑받으면 사랑을 공기처럼 당연시하게 된다. 문을 열고 나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싶은 욕구를 전혀 배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휴 그랜트는 사랑에 눈물짓고 피 흘리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웃기 위해 사랑하는 로맨틱코미디의 연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이 절절한 무엇이기를 바라지만, 홍해가 갈라지고 아마존 밀림이 쓰러지는 위대한 연애만 평생 하다가는 모두 심장이 졸아 붙어 죽게 될 것이다.(344p)
ㅡ 김혜리, <영화야 미안해> 中,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