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中, 반비
2017/5/31
살구가 오기 두 해 전 여름, 어머니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길을 잃고, 본인의 집 안에 갇히고, 여러 차례 응급 상황에 빠져 내게 구해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하는 일들이 생겼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내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형제 셋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모두 지역번호가 다른 곳에 살거나 그사이에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 왔다. 그들은 어머니의 가장 좋은 모습만 상영하는 극장의 관객이었고, 어머니도 그걸 바라셨다. 나는 늘 무대 뒤에, 상황이 훨씬 더 지저분한 곳에 머물렀다. (...) 형제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이 각자 부담을 나누어 가졌지만,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어머니가 전화를 거는 대상은 언제나 나였다. 한번은 왜 다른 형제들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고 늘 나만 찾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너는 딸이잖아.”그러고는 덧붙였다. “너는 온종일 집 안에만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작가의 삶은 그렇게 묘사될 수도 있었다.(16-17p)
노인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낭만적 사랑이나 아이를 낳는 일 같은 다른 종류의 헌신에 비해, 조언이나 독려가 될 만한 분량의 글이 없다. 그 일은 마치 예정에 없던 어떤 일처럼 슬그머니, 마치 한 번도 경고를 받지 못했고 지도에도 없던 암반으로 가득한 해변처럼, 갑자기 당신 앞에 닥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삶의 말년은 그 모든 세월이 지혜가 되는 황금빛 시기이지, 엉망진창인 어린 시절로 혹은 그 너머로 퇴행하고, 정신병처럼 보이는 질병으로 썩어 가는 시기가 아니다.(20p)
하지만 어머니 본인도 모험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젊었을 때는 동생을 설득해서 함께 버스로 전국 일주를 했고, 당신 세대의 미혼 여성이 일반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 집에 머무르지 않고, 혼자 플로리다로 떠났다. 결혼을 하자마자 군인이었던 유대인 남편을 따라 독일에 갔고, 그다음에는 서부와 남미에서 살기도 했다. 한편 어머니는 많은 모험을 거부하며 오랫동안 안전이나 절약만을 위한 선택을 했던 적도 있었다. 안정감과 상상 속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또 희생하고 나서는, ‘될 수도 있었을 것들’을 아쉬워했다. 두려움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너무 자주 “안 돼”라고 말했고, 나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다.(57-58p)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99p)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우리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지지 않고,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고, 하루하루의 대혼란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두 사람이, 본인들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우연히 함께 있었다. 둘은 서로의 유사함에 혹은 차이에 끌린다. 각자의 두려움과 한계를 오랜 기간 극복하고, 두 세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생겨난다.(106p)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 바로 변신 이야기의 조각들이다. 자신을 안으려는 아폴로를 피해 월계수로 변해 버린 다프네처럼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도 있고, 자신의 남은 생을 극저온 상태로 보존하려고 애쓰는 부자들처럼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도 있지만, 수용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 변신 자체는 피할 수 없다. 위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해 낼 수는 있지만, 변화나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그 후엔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 다른 장소가 된다. 전쟁은 잠잠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국가도 사라지고,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썩어 간다. 한때 서로 전쟁을 벌이던, 육체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이제는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연인이 되고, 새가 된다. 모든 훈장은 낯선 이의 장난감이 된다. 대포를 녹여 만든 교회의 종이, 다시 녹아 대포가 되어 다른 전쟁에서 사용된다.(122p)
나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상하게 하는 건 정작 병 자체가 아님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당시 나의 상황에 놀랄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151p)
신경이 없는 신체 부위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 준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 매우 섬세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으면 아플 테니까. 움찔하고, 눈을 깜빡이고, 눈물이 흐른다. 나병에 걸리면, 깜빡임을 멈출 것이다. 그렇게 눈물이 마르고, 어쩌면 너무 심하게 긁어서 각막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 어딘가 다쳤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리면 보통 그런 무감각 상태가 된다.(153p)
“고통은, 그 사촌 격인 촉각과 함께 온몸에 퍼져 있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 수술 후에도 환자들은 완치된 자신의 손발을 그저 도구나 의수 혹은 의족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고통과 함께 형성되는 기본적인 자기보호 본능을 그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중 한 아이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제 손발이 제 일부로 느껴지지가 않아요. 내가 쓸 수 있는 도구이긴 하지만, 진짜 나는 아닌 것 같아요.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만, 제 생각엔 죽은 부분인 것 같거든요.’ 다른 환자들도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전체로 인식하는 데 있어 고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5-156p)
“가까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전한다. 뉴욕에서 몇 년을 지낸 후 뉴멕시코의 시골로 이사한 조지아 오키프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인사말을 덧붙였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은 그 자체의 거리를 가진다. 애정은 근처에 가까이 있는 것, 자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침대 옆에 함께 누운 사람과 수천 마일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세상 반대편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에 깊이 마음을 둘 수도 있다.(160p)
두 젊은이는 성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음식과 잠자리를 얻기 위해 약간씩 거짓말도 하고, 나병 전문의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과장하기도 했으며,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여정에서 만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기도 했다. 기회가 있을 때면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을 나오기도 했다. 사고로 개를 한 마리 쏴 죽이는 일도 있었고, 젊은 남자들이 종종 그렇듯이, 일을 엉망으로 망쳐서 다른 사람들이 수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그들은 나환자촌에서 가장 길게 머무르는 의사들이었고, 장갑 같은 보호 장비 없이 직접 환자들과 접촉하고, 나중에는 함께 축구까지 하면서 전례를 깨뜨렸다.(162-163p)
어머니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했다. 나병의 진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사람, 그래서 나에게 감정이입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사람이,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에 나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참 고약한 아이러니였다.(169-170p)
질병이나 재난의 의아한 점 중 하나는,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이 무언가를 희망하고 무언가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는 점이다.(186-187p)
질병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홀로, 자족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뜨림으로써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한다. 당신은 타인의 골수나 혈액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사랑하는 이들의 보살핌도 필요하다. 당신이 병에 걸린 이유는 모기에 물렸다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거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혹은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생물학적인 존재라는 사실, 유한하며, 타자와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191p)
크게 아프거나 다치고 나면 어떤 단절이 생기고,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된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이며 그것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한다.(204p)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늙음과 병, 죽음을 완전히 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부러 혹은 다른 이유로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잊고 지낸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떤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하거나 상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실감하고 나면 그게 우리든 당신이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이 든 어머니가 아프고, 곧이어 나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친구 앤이 죽어가고, 넬리의 딸이 위험한 상태로 태어났던 그해 살구 수확기에, 나는 그 점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222p)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가끔은 나쁜 소식이 우리를 진실한 삶의 길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난폭하게만 보였던 손님에게 나중에 감사하게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대부분 꼭 변해야 할 때가 아니면 변하지 않게 마련이고, 위기가 변화를 강요하기도 한다. 국가적인 위기든 단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위기든,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위기가 있는 것이다.(223-224p)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259-260p)
인간은 존재하고 사라지고, 변신하고 사그라지지만, 한밤의 빛깔을 닮은 파란색 양모 옷감은 사실상 50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겨울에 결혼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부케 대신 흰색 방한 토시를 들고 있다. 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물 가죽이 대신 들어선 것이다. 그 옷을 입었던 키 크고 날씬하고 머리색이 짙은 아가씨는 이제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되었고, 머리는 추모객을 표현한 조각상보다 더 하얗게 세어 버렸다. (...) 어머니가 꼈던 결혼반지, 작고 동그란 터키옥이 케이크나 쿠키의 과자 장식처럼 박혀 있던 그 금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지만, 방한 토시는 뜯어지거나 버려졌을망정, 반지의 금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지도 않는다. 나무로 만든 종이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것도 몇 세기는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는 닳아 없어진다. 어머니의 양모 정장은 그것을 알고 있거나, 그것을 아꼈던 모든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양모나 실크일 뿐인데도 그렇다. 돌이나 금속, 나무는 훨씬 오래 유지된다.(324-325p)
친절했던 담당 의사는 어머니를 돌봐 주는 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어머니가 넘어졌다고 말했지만, 어머니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면 또한 어머니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했을 것이다.(334p)
어머니는 보상과 공정함을 원했다. 각 항목의 값이 맞아떨어지기를, 받기로 되어 있는 것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죄와 미덕, 참회, 벌 그리고 보상이라는 가톨릭의 체계가 교회를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어머니를 이끌었고,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서 또한 강력한 힘이었다. 마침내 그 모든 계산과 셈도 희미해졌다. 궁핍하다는 느낌과 자신은 받을 것이 있다는 확신, 전쟁 같았던 체스 게임도 희미해졌다. 복수와 용서는 셈을 정리하는 일이었지만, 셈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얽어매던 그 관계를 묘사하기에 너무 추하다. 나는 결국 끝에 가서는 모든 게 드러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지평선 너머, 우리가 알아보거나 판단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비극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들은 잘못을 범하기 전에 벌부터 받아 버린 거라고, 어쩌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것인지 모른다.(343-344p)
아이가 우물에 빠진 이유는 엄마가 전화를 받으러 집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고, 누군가 우물의 뚜껑을 덮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늘 우리 주변에, 모든 방식으로 존재한다. 줄리아 프린시프 잭슨 덕워스는 첫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870년의 어느 날, 남편이 그녀를 위해 무화과를 따 주려다가 몸에 있던 종기가 터졌고, 상처가 감염되면서 이내 죽고 말았다. 줄리아는 재혼을 했고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버지니아 스티븐스를 비롯한 아이 넷을 낳았다. 전화 한 통. 무화과 하나. 생기지 않았을 일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삶은 더 좋은 방향으로 혹은 더 나쁜 방향으로 변했다.(356-357p)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 하나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이야기를 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359p)
ㅡ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中, 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