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中, 어크로스
2017/6/2
물론 나라고 늘 투덜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불평을 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필요하고 언젠가부터 나는 쉬이 지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운동 따위 하지 않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밥을 밥 먹듯 거르고 날밤을 예사로 새우면 이렇게 된다. 혹시라도 불평을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나와 같은 생활 습관을 가져보시길. 얼마 안 가 순한 양처럼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즘 내가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58-59p)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81p)
오늘날에도 넓은 길들이 나 있는 대도시의 뒷골목을 보면 비좁기 그지없다. 얼마나 비좁은지 이쪽 창문에서 건너편 창문으로 손을 내밀 수 있을 정도이다. 만약 돈 많고 감정도 풍부한 낯선 사람이 우연히 비좁은 뒷골목을 찾는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 것이다.
“와, 그림 같다!”
멋진 숙녀는 ‘아!’하고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얼마나 평화롭고 낭만적인지 몰라요!”
하지만 평화롭고 낭만적이란 표현은 엄청난 잘못이며 거짓이다. 왜냐하면 뒷골목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대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비참하고 시기심이 많고 툭하면 싸움을 벌이기 일쑤이다. 그건 그 사람들 탓만이 아니라, 좁은 길 때문이기도 하다.(86-87p)
바르트는 첫 번째 강의 단테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단테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삶의 노정 중간에서.’ 이 구절을 썼을 때 단테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보다 나이가 많고, 따라서 산술적으로 계산해보아 삶의 노정에서 중간보다 멀리 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중간은 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종의 분기점이다. 분기점에 선 그는 생각한다. “뭐라고요? 죽을 때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단지 바뀔 뿐인(아주 조금!) 주제들에 대해 늘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고, 강연을 하게ㅡ기껏해야 책을 쓰게ㅡ될 거라고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바르트는 글을 썼던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장(場) 역시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새로운 글쓰기를 실천함으로써 과거의 지적 실천과 결별하는 것. 그래서 그는 소설을 쓰기로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소설-쓰기는 새로운 삶을 향한 돌파구였고, 새로운 삶 그 자체였다. <새로운 삶Vita Nova>은 또한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0년 2월 25일, “소설의 준비”라고 이름 붙인 강의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그를 세탁소 트럭이 덮쳤고, 한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비통한 아이러니.(101-102p)
매일의 압박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이따금, 그저 조간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좌절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자기 자신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물론 우리나라 정부에도 화가 미친다. 이 모든 분노를 뒤로하고 매일의 일과를 계속해나가려면 상당히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06p)
‘그자’, 혹은 ‘이십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은 누구인가? 물론 포르투갈 출신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다. 몰랐다고? 상관없다. 어느 무심한 웨이터가 말했듯, “모르셨다면 이제 아시면 됩니다.”(122p)
마침내 ‘나’는 유령을 만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남. 타부키가 그의 시인에게 말한다. “저는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어요, 이제는 피곤합니다. 그만둬야 할 때가 왔어요. 그게 다예요.” 시인이 묻는다. “나와 함께한 것이 편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대단히 중요했어요, 말하자면 언제나 날 가만두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시인이 말한다. “나와 관계된 건 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말예요, 문학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안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의식을 평온하게 하는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문학에 대해서, 정직함에 대해서,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음식들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 그럼에도, 이미 이곳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123-124p)
파일럿의 가장 큰 불안은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불안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일럿은 실제로 비행기를 추락시킴으로써,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가 됨으로써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126p)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140-141p)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글을 쓸 때’ 당신에게 고함을 지르는 내면의 편집자일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꺼두라. 스스로에게 심술궂게 행동할 자유를 주라. 일단 쓰고, 나중에 다듬어라. 이것이 창작의 황금률이다.(144p)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148p)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167p)
헌책방 일을 시작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직원으로 일한 것까지 합치면 거의 10년을 헌책방에서 책과 씨름하며 보낸 것이다. 헌책방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하며 책을 산다. 그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점에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본 다음 산다. 그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인다. 헌책방은 오래된 책을 사는 곳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곳은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다.(186p)
결혼을 코앞에 둔 이웃 청년에게 쓴 편지는 그보다는 나았습니다. 여덟 개의 충고 중에서 두어 개는 꽤 유용했으니까요. 이를테면 “2. 커피가 형편없어도 절대 말하지 말 것. 그냥 바닥에 쏟아버릴 것”이라거나 “5. 다툼이 있을 때는, 잘못은 항상 당신에게 있음을 명심할 것” 같은 것들이 그랬죠. 덕분에 저는 커피를 쏟아버린 후 “미안해, 내 사랑, 다 내 잘못이야. 커피를 쏟은 것도, 커피에서 젖은 신문지 맛이 나는 것도”라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 되었습니다(거짓말입니다.).(199p)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그가 논리를 쌓고 다시 그것을 비트는 방식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배열이다. 솜사탕은 설탕이 아니다.
(...)
“어떤 것이 오로지 우아함을 위해 존재한다면, 우아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떤 것이 엄숙한 척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엄숙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정쩡하게 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거기엔 어떤 자유도 없다. 남자가 숙녀에게 모자를 들어보이는 것은 관례적인 상징이 담긴 행동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아,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또한 나는 옛 퀘이커 교도처럼 이 상징적 행위를 미신적 관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숙녀에게 모자를 들어 보이기를 거부하는 남자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 아닌, 제멋대로인 존경 방식을 행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숙녀에게 모자를 벗어 보이지 않을 광신도도 존중한다. 그런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숙녀에게 대신 자기 모자를 벗겨 달라고 요청하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204-205p)
주로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이고, 그건 예술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시일 수도 있고, 치즈 조각일 수도 있는거죠.(213p)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는 한편 책의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책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있다.(224p)
결국 모든 것은 ‘어쩌다’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어쩌다, 도대체 어쩌다···· 후회해도 이미 늦다. 물은 엎질러지고, 책장은 넘어간다. 페이지를 되돌릴 순 있어도 이미 읽은 것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폐해다. 오늘 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다.(227p)
재취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게으름을 이기지 못했다.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면 게으름은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232p)
ㅡ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中, 어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