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中, 뮤진트리
2017/7/25
나한테는 그냥 바보 같은 소리였다. 인생이 개체 단위가 아니라 종족 단위로 돌아간다는 건 너무 분명한 사실이다. 개개인은 그저 나고 자라서 아이를 낳고 시들다 후손에게 자리를 내주고 죽는다. 저마다 어찌 생각하든 인간이라면 예외가 없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시들어가는 노년기를 성장기보다 늘이려 애써왔다. 그러니 노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노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21p)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고, 또 당신이 죽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냉정하게 논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달리 정말로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너무 자주 쓰는 말이라 진부한 상투어가 돼버렸는데, 그건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죽는 과정이 무섭다’는 말이다. 죽어가는 광경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면 그 말이 정말 실감난다. 내 어머니는 죽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협심증이 닥치면 숨을 쉬지 못해 매우 겁을 냈다. 나도 어머니가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죽어가는 과정을 보는 건 겁이 났다.(33p)
시체를 다루는 사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을 경멸한다.
왜? 어떻게? 무엇이? 어디서? 유족들은 속으로 외치는데
시체 처리하는 사내들은 누꺼풀을 내려
은밀하지만 그 성마르고 상스러운 눈길을 감춘다.
개중에는 좋은 직장을 잡은 시체애호증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죽음을 다루면서
죽음이란 할 말이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보통 사람들이다.
처음 이런 차들을 알아보고는
소름이 끼칠 줄 알았다.
그런데 외려 기운이 나서 아직도 놀란다.
그런 차를 보면 생각한다.
‘저기 죽음이 가네. 일과를 시작하는구나.
그런데 저들은 내가 모른다 생각하겠지.
저희만 죽음이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아는 배짱이 있다고.(38-39p)
나는 충실함이니 충성이니 신의니 하는 미덕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안드레 도이치가 하도 그 말을 남용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 출판사를 떠나는 작가들을 ‘신의가 없다’며 비난하곤 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출판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여기는 회사에 신의를 지켜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다. 회사가 일을 잘해주면 감사와 애착 정도야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충성의 유대가 형성되는 건 아니다. 그런 유대가 존재한다면ㅡ예를 들면 가족이나 정당에 대한 신의가 그렇다ㅡ상대가 배신하는데도 그 유대를 깨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형제가 살인자라는 게 밝혀졌거나 지지하는 정당이 정책을 바꿨을 경우, 그래도 시종일관 그 편을 든다면 내가 볼 땐 그건 아무 생각이 없는 짓이다. 공짜로 얻은 충성은 봉건제도 하에서 두목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나 좋으라고 생긴 허세 가득한 개념이다. 배우자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친절과 배려이지 신의나 충실은 아닌 것 같다. 정절을 안 지킨다고 친절과 배려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57p)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단편소설 <문구멍>이 생각난다. 한 젊은이가 결혼 전날 밤 연인의 집을 찾아갔다가 약혼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문구멍을 들여다보다 약혼녀가 누가 봐도 열렬한 몸짓으로 문지기의 키스를 받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 일로 약혼은 끝이다. 화자는 젊은이 역시 흉하게도 그날 오후 하녀와 놀아났음을 상기시키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더 평이하고 행복했을지 시사한다. 이는 현명하고 노련한 싱어가 늘 독자의 손에 도덕적 판결을 맡기는 특유의 트릭을 쓰면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주제다. 싱어가 자신의 종교적 배경에 깊은 애착을 가졌음을 고려하건대 내가 내놓는 판단에 동의해줄까 싶지만, 어쨌거나 판단을 내려보라고 하니까. 맞다, 모르고 있으면 해로울 게 전혀 없는 일들이 있다. 성적 부정도 그중 하나다. 이 경우는 알고 인정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더 좋은 건 개개인과 그 상황에 맡기는 것이고. 내가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은 이 질문뿐이다. 부정한 아내를 죽이지 않으면 온 가족의 명예가 더러워진다는 극단적인 생각과, 성적 부정이라는 게 아무리 봐도 칭찬할 만한 행동은 아니라도 적절히 처신한다면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고방식 중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프랑스 만세다!(58-59p)
신앙이란 믿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작정하는 것이고, 그런 결정으로 믿음이 생겨나고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해 신이니 창조니 영원이니 하는 개념을 들먹이는 게 참새들의 지저귐보다 더 의미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전적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우주는 우리가 뭘 믿건 간에 지금처럼 존속할 것이고 늘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우리 존재의 조건일 거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안에 사는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사고하는 일이 왜 지루할까? 지루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두려운 걸까?(82p)
그러니 만일 사랑하는 아이가 나이든 당신을 현명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봐준다면(설령 잘못 봤다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언뜻 그렇게 봐준다고 해서 현명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마사지 한 번 잘 받는 것과 비슷하다. 마사지를 받는다고 아픈 게 낫는 건 아니지만 받는 동안만큼은 좋아지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면 받을 만하지 않은가.
그런 평가는 들을 가능성이 희박해도 자꾸 들을수록 소중해지기에 중독될 위험이 있다.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 곁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괴팍한 노인네가 분명하지만, 그래도 중독될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조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여자건 남자건 간에. 얼마 전 어느 만찬 자리에서 육십대 후반 내지 칠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활기 넘치는 남자 옆에 앉았는데, 그는 자기가 젊은이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면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젊은이들이 자신을 또래처럼 여기는 것 같다고 주책없이 떠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 지적인 얼굴에 얼빠진 미소가 슬쩍 스쳤다. 딱하기도 해라! 그게 내 느낌이었다. 그래서 분명 부질없는 짓일 줄 알면서도 불친절하게도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을 얘기해줬다.
내 나이 열여덟인가 열아홉이었을 때, 우리 집 근처에 살던 한 남자의 결혼 소식에 모두가 놀란 일이 있었다. 다들 그 남자가 독신주의자인 줄 알았고 (내 생각에) 나이가 마흔아홉이나 된데다 독신인 것에 만족하는 듯 보여서 둔감한가 보다 했지 게이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사십대 중반의 적당한 여성을 찾아내 아내로 삼은 걸 알고 잘됐다고 기뻐했지만 좀 재미있다는 투로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 그 남자 얘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나는 춤추러 갔다가 이제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이 보이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칼에 자그마하고 평범한 모습이지만 즐거워 보이는 두 늙은이를. 아니, 즐거워 보인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미친 듯이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뺨을 비벼대며 춤을 췄다. 그런데 그게 역겨웠다. ‘저 늙은이들은 아직도 사랑을 나누는 게 분명해(그 시절에는 성교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는 품위 정도는 갖춰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나는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면 감히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건 꿈도 못 꿨을 상냥한 양갓집 규수였다.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세련돼서 대다수가ㅡ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은 확실히 그렇다ㅡ우리 때보다 손윗사람들과 훨씬 잘 지내는 것 같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할 거라 기대하거나 동년배 친구에게 청할 일을 그들에게 청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된다. 그들이 너그러이 베푸는 건 뭐든 즐겁게 받으시라.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110-113p)
아아 너무나 맞는 말이다. 모름지기 나이를 먹어가는 모두가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슬프고도 지루한 생활로 돌아갔다. 가끔씩 나 자신에게 묻는다. 무엇이 나를 버티게 하는 걸까? 분명 다른 수많은 노부부들이나 부부처럼 사는 커플들도 상황이 비슷할 텐데 매일같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까? 한 가지 답변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이렇게 비유해볼 수 있겠다. 식물을 보면 뿌리와 그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 끝에 달린 꽃이나 열매는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식물의 부분이다. 그렇듯 사랑과 그 사랑에서 자라난 의무감도 정말이지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지만 그 역시 같은 것의 부분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두 가지가 그렇게 쉽사리 엮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달갑지 않은데? 이런 경우에는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게 아니다. 대안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까.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의무를 훌륭히 수행하는 데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의무를 행하면서도 되도록 많은 탈출구와 보상을 마련하면서 버텨나갈 테고. 썩 훌륭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런 것에 기대는 늙은이가 나 하나만은 아닐 것 같다.(159-160p)
다행히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데려가주는 소설들은 얘기가 다르다. 나이폴이나 필립 로스의 책이 그렇다. 그리고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 역시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 엘리엇, 디킨슨, 프루스트, 플로베르, 트롤럽(그렇다, 나는 트롤럽도 그 반열에 올린다. 내 생각에 지금까지 그는 심하게 저평가되어왔다)과 같은 문학의 거인들 말이다. 그런 작가들은 매우 보기 드문데, 그건 그들이 천재적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해도 그리 과하지 않을 탁월한 상상력을 가졌다. 현대 소설가들은 정말 어쩌다 한 번 그런 작가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비록 읽다가 기진맥진하긴 해도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인피니트 제스트>에서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싶다. 마거릿 애트우드도 종종 그 경지에 들어서고 팻 바커도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연작 소설들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또 힐러리 맨틀도 <혁명 극장>에서 확실히 그런 능력을 보여주었다(프랑스혁명을 로베스피에르, 카미유 데물랭, 그리고 당통의 입장에서 보는 그 배짱이라니!).
또 물론 그들이 쓰는 작품과 무관하게 그 정신에 반하게 되는 소설가들도 있다. 나한테는 체호프, 제발트 그리고 앨리스 먼로가 그런 작가들인데, 매우 다른 이 세 작가의 매력을 분석하지는 않겠다.(168-169p)
글을 계속 쓰고 싶어도 뭔가가 나오려고 근질거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편지나 광고문이나 서평 같은 글은 일상적으로 쓰면서 쉽게 종이를 메울 수 있었지만, 내 안에서 압박을 느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면 글쓰기는 지지부진해졌다. 끈덕지게 종이를 채워나갈 수는 있어도 터벅터벅 힘들게 나아가 지루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왜 그런지는 한 번도 작정하고 따져본 적이 없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리듬을 타는 것, 아니 어쩌면 리듬을 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리듬을 못 타면 내 문장들은 죽어버린다. 리듬을 타게 되면(언제 내가 리듬을 타는지 늘 알 수 있는데 어떻게 리듬을 타느냐고는 묻지 말기를) 문장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진정한 작가는 그런 훈련이 잘되어 있을 테고, 그 신비로운 리듬에 더 쉽게 접근하는 재능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그 리듬을 계속 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특정한 자극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늘 내가 아마추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글쓰기”라는 말을 거둬들이겠다는 뜻은 아니다.(186-187p)
늙으서 그런 경험을 하면 그냥 흐뭇한 정도가 아니라 가슴 벅차도록 기쁜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뜻밖의 일이라서 그렇다. 그랬기에 둘 다 모두 ‘좋다’는 반응에 정말 놀랐다. 마치 뜻밖의 엄청난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것이 나이 들었기에 얻은 첫째 이득이었다. 둘째 이유는, 이젠 마음 깊이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젊을 때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가 상당 부분 결정된다. 이런 현상은 중년까지도 계속되는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이 성이다. 학창 시절의 동창생 하나가 생각난다. 통통하고 좀 평범해서 호감은 가지만 지루한 애였다. 그런데 졸업하고 일 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승강장에서 마주쳤는데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몰라보게 아름다워져서였다. 사연인즉, 우리 둘 다 알던 근사한 남자가 내가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무척 예쁘게 봤고, 덕분에 그녀는 행복에 빠져 그렇게 예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자존심의 다른 측면과 관련해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자존심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일로 인해 성년 초기에 여러 해 동안 자존심이 상당히 낮아졌다. 하지만 늙으면 이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된다. 운이 아주 나쁘지 않은 한 말이다. 사십대에는 남들 눈에 책을 써서 출판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나를 변화시켰다(어쨌거나 더 좋은 쪽으로. 하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나쁜 쪽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나의 팔십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어떤 일도 그런 식으로 내 자존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는데, 그게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뭔가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마음이 설렐 만큼 신나는 일들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뭐 그런 것. 그래도 단순히 즐길 수는 있다. 그저 재미있는 경험으로 말이다.(192-195p)
누구든 여든아홉 해를 되돌아본다면 후회로 점철된 풍경을 보아야만 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자기 자신의 결함과 나태, 빠뜨리고 간과한 것, 다른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들이 세운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이 세운 이상에도 미치지 못한 무수한 면모를 훤히 알게 되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분명 유감스러운 수많은 사건을 토해냈겠지만ㅡ정말이지 확실히 그렇다ㅡ내 시야에서는 사라져버렸다. 후회?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무슨 후회? 그 일들이 보이지 않는 건 상상력보다는 상식이 앞선 탓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후회란 부질없는 것이니 잊자는.(199p)
이제 늙으니 예전보다는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에게 훨씬 더 관심이 간다. 실제로 아이들 옆에 있으면 즐겁다. 최근에는 우리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 매우 기뻤다.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감탄하는 일 말고는 그 아이에게 해줄 일이 아무것도 없어 다행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아이나 손주가 없는 게 정말로 아쉽진 않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쉽긴요, 정말이에요“라는 대답이 나온다. 요즘 내가 보게 되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유망해 보이는 건 내가 그 아이들의 생활에 깊이 개입해 골치 썩을 일이 없고 또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서다.
이기심. 바라건대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아이에게 자신을 내줘야 하는 어머니처럼 나의 온 자아를 내줘야 하는 일이면 경계하게 만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런 고갱이 정도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아이를 잃고도 쉽게 극복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어쨌든 적어도 한 가지 큰 후횟거리는 있는 셈이다. 내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 이기심, 내가 아이가 없는 걸 유감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실히 폭로해버린 그 이기심 말이다.(205-206p)
내가 내 마음대로의 단 한 가지 인생을 사는 것에 전혀 조바심 내지 않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그건 아니다. 내가 책을 읽는 건 대개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그 느낌이 좋아서이고 연애를 한 것도 거의 같은 이유에서였다(언젠가 성적인 관계를 바닥이 유리로 된 배를 타고 나가는 것에 비유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게으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자면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한테 없는 게 바로 그것이다. 비록 그럴 용기와 에너지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해도 나는 절대 조산사 같은 유익한 일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그곳의 언어를 배워볼 수는 있지 않았을까. 가령 그리스에 가서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 말이다. 현재 그리스어를 배워 그리스로 가서 돈을 벌어 생활하면서 그 나라를 진지하게 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꽤 자주 했지만, 야간 그리스어 강좌를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
그러니 결국 크게 유감스러운 일은 두 가지다.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냉정함과 게으름(내가 결단력 있게 뭔가를 해내지 못한 건 겁이 많아서라기보다는ㅡ겁도 좀 있긴 하지만ㅡ게으른 탓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런 점이 애석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괴롭다거나 그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고는 말 못 하겠다.(208-209p)
여기까지 와 되돌아보니 인간의 삶이란 우주적 견지에서 보면 눈 한번 깜빡이는 것보다 짧아도 그 자체로 보면 놀랍도록 넉넉해 서로 대립되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고요함과 소란스러움, 비탄과 행복, 냉담함과 따스함, 거머쥠과 베풂이 모두 담길 수 있다. 또한 좀 더 특정하게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우쭐대는 것으로 보일 만큼 성공했다는 강박적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불운이란 더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옮겨가 거기서 멈춰 개인의 안전과 행복이 파괴돼 버리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인생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양극단으로의 치우침이라기보다는 부침의 문제인 것 같고, 대개는 시작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 멈추는 듯하다. 마치 그 시작점이 기준점이라서 늘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알리스의 인생도 대체로 훨씬 극과 극을 오가는 호를 그리긴 했어도 이런 패턴을 따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산 걸 봤고 내 인생 역시 지금까지 그래 왔기 때문이다.(217-218p)
그런데 인생이 다양한 것들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그래서 언뜻 보면 인생이 참 굉장해 보이다가도 좀 있으면 바로 그 반대의 생각이, 그저 인간의 기준으로 봐도 인생이란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개인의 삶이란 막막하리만치 하찮은데, 내가 여태껏 하고 있는 일, 생각한 것, 그리고 내가 이렇네 저렇네 하면서 쓰고 있는 이 일 역시 그렇지 않을까?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런 질문을 한다. 비록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본능적인 기대는 어쩌지 못해도.(221p)
ㅡ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中, 뮤진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