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中, 청림출판
2017/9/3
맥루한은 이 옹호자들과 회의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가해지는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결국 미디어 콘텐츠는 미디어 그 자체보다 덜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대중 매체는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결정하고,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을 바꾸어놓는다. 맥루한은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오히려 이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다는 것이다. 이 배우는 자신의 논지를 명확히 하려 과장하기는 했지만 핵심만은 명료하다. 미디어가 신경 체계 그 자체에 마법을 부리거나 장난을 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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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는 기기를 만들어 낸 자들의 죄를 기기 그 자체에 떠넘겨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산물은 그 자체로는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기기의 가치는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라고 말했다.
맥루한은 이 같은 발상을 비웃으며 “몽유병에 걸린 자의 말”이라고 쏘아붙였다. 맥루한은 모든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 즉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식의 생각은 기계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한 태도”라고 적었다. 미디어 콘텐츠는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9-11p)
니체가 타자기에 끼워진 종이 위에 단어를 칠 때 까달은 것처럼 우리가 쓰고, 읽고, 정보를 조작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우리 사고가 그 기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역시 우리 사고에도 모종의 작용을 한다는 사실은 지적·문화적 역사에 있어 핵심이 되는 주제였다.(74p)
이 책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니체의 그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발명가들은 기술에 대한 지적 윤리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발명가들은 특정 문제나 골치 아픈 과학적 기술적 딜레마를 푸는 데만 지나치게 집중해 자신들이 한 일이 가져올 거시적인 영향은 보지 못한다. 이 기술을 사용하는 자들 역시 그 윤리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그들 역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실용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 역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실용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개념적 사고의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세상의 숨겨진 구조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지도를 개발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시계를 제조한 이들도 이 기계가 과학적 사고를 더욱 촉진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기술의 부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무슨 부산물이란 말인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심오한 영향을 준 것은 개발자의 지적 윤리다. 지적 윤리는 매개물이나 수단이 사용자들의 사고나 문화에 심어놓는 메시지다.(75p)
지식을 위해 읽기에 의존하는 이들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도 했다.(87p)
완전 찔림. 내 경우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결정적으로 다르지만 ㅋㅋ
같은 해에 발표된 다른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일련의 문서를 검색한 후 몇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했다. 한 그룹은 전자 하이퍼텍스트 문서를 통해 검색했고, 다른 그룹은 전통적인 종이 문서를 통해 검색했다. 종이 문서를 사용한 그룹은 질문지를 완성하는 데 있어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한 그룹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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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통한 프레젠테이션(익숙한 상황)과 하이퍼텍스트(인지적으로 힘든 낯선 상황)의 경험적인 비교에서 언제나 하이퍼텍스트를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독자들이 “하이퍼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을 더 기르면서 인지적 문제는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직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월드와이드웹은 하이퍼텍스트를 보편화했고, 실상 어디에나 존재하게 했지만 선형적인 문서를 읽는 사람들이 링크가 가미된 문서를 읽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기억하고, 더 많이 배운다는 연구 결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189-190p)
“우리의 결혼은 산만한 상태에서 사실과 개념을 배울 경우 더 나쁜 결과를 낳음을 시사한다”(199p)
당연한 거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연구까지 해가며 성의 있게 하고 있다. 설마 산만한 상태가 집중한 상태보다 사실과 개념 학습을 더 잘 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 부모나 부모의 부모보다 똑똑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똑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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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젖먹이 때부터 사물을 일정 범주 가운데 분류하고, 퍼즐을 풀고, 상징의 언어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사용으로 우리의 시각적 예리함, 특히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또 다른 자극들을 재빠르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킴으로써 이 같은 몇몇 정신적 기술과 이 일에 관여하는 신경 회로들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플린이 강조했듯이 이 점이 우리가 “더 나은 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뇌’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218-219p)
그래. 더 똑똑해진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똑똑하지. 근데 왜 그걸 부정적으로 보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수직적인 우열의 변화가 아니라 수평적인 다름의 문제일 텐데 바뀐 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모습이 의아하다.
글쓰기가 기억력을 약화시킬 것이라 우려하며 소크라테스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이 두려움이란 ‘새로운 기술적 성과가 우리의 소중하고 생산적이라고 여겼던 것, 그 고유한 가치를 가지며 매우 영적인 것이라고 여겼던 무언가를 없애거나 또는 파괴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두려움은 적절하지 않은 감정인 것으로 드러났다. 책은 기억력에 대한 보조 역할을 했지만 에코가 말했듯이 이는 또한 기억력을 자극하고 개선시키는 것이었지 도리어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261p)
ㅡ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中, 청림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