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中, 인물과 사상사
2017/9/13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겉을 간단하게 훑을 수 있는 책이다. 성실하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들의 꾸짖음에 상처받고 모처럼 착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치자. 예상대로 칭찬이 폭포수 같이 쏟아진다. 가족이 보면서 다 같이 울었단다.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고도 한다. 이런 프로그램이 왜 이제야 나왔느냐고 개탄하는 시청자도 있다. 하지만 다음 날 시청률을 받아보면 그래프가 X축을 따라 바닥에 납작 붙어 기어간다. 칭찬만 하고 아무도 보지 않은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시청자들의 배신에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받는다.”
시청자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점도 있겠지만, 의견을 밝히는 시청자와 의견을 밝히지 않는 시청자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절대다수는 자기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게 할 시간도 없고 정성도 없다. 그냥 시청하거나 말거나 하는 양자택일 방식으로만 말할 뿐이다. 선거에서의 일반적인 유권자의 행태, 즉 단지 투표 행위만으로 모든 참여를 대신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문화적 민주주의는 정치 민주주의의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운 것일까?(103P)
이런 논란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원론 수준에서 생각해보자. 드라마가 어떤 잘못된 현실을 고발하고 싶어 한다. 고발하기 위해선 그런 현실을 실감나고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아우성친다.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 반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126P)
트위터는 그런 ‘140자 평등주의’의 장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왜 두 얼굴인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대화를 나누는 건 상당한 실력과 더불어 인내심을 요구하는 토론이나 논쟁보다 훨씬 재미있다. 뜻과 배짱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주고받는 이야기, 그 얼마나 화기애애한가. 사실 이게 바로 SNS의 속성이기도 하다. SNS는 관계 테크놀로지인데, 관계의 숙명은 편협이다. 본질적으로 관게 중심으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박경철은 SNS로 인해 “편협한 주장이 자기정당성을 획득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SNS의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중성의 부족’에 있다. 기본적으로 SNS는 온라인상의 친분이 우선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만 반응한다. 때문에 SNS상에서 나의 견해는 늘 옳은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지 않은 대중들이 모두 자유롭게 반응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집중적이고 확산성이 강한 SNS는 정작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종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 SNS에서 오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177-178P)
한국 영화 산업의 위기여부와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1,000만 신드롬은 계속될 것이다. 한국 문화 특유의 쏠림 현상 때문이다. 1,000만 관객이라곤 하지만, 영화계 쪽에선 영화에 진짜 관심이 있어서 본 사람은 20퍼센트가 안 될 것으로 본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일단 어디가 음식을 잘한다고 소문나면 우르르 몰려가 줄을 서서라도 반드시 그 집 음식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이다.
이런 쏠림은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과도한 도시화와 일극 집중체제로 인한 인구 밀집성, 남들의 언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타인지향성의 산물이다. 이런 조건은 여론을 획일화의 압력의 산물로 보는 침묵의 나선 이론의 설명력을 높여준다. 우리는 어떤 의견과 행동 양식이 우세한가를 판단하여 그에 따라 의견을 세우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중문화 소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이 각종 바람과 신드롬의 나라가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208-209P)
2000년대 중반부터 독립, 예술, 저예산, 실험 영화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다양성 영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이들 중에서도 제작 및 유통 규모에서 약자에 위치한 독립 영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예술 영화 전용관 25개, 독립 영화 전용관 3개, 고전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15개에 지원하고 있다. 예술 영화 전용관에는 한국 독립 영화를 연간 최소 73일 틀어야 하는 쿼터제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들 영화관을 다 합쳐도 50개관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2013년 2월 4일 현재 박스오피스 1, 2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베를린>과 <7번방의 선물>이 상여되고 있는 스크린 수는 자그마치 1,553개다. 한국에 있는 스크린 수가 총 2,081개인 것을 감안할 때 두 편의 영화가 우리나라 영화관의 74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이다. ‘극장에 가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음악이든 영화든 인디 문화의 저항은 현실적으론 막감 유통 권력에 대한 저항의 뜻이 강하다. 우리는 문화 콘텐츠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통이다. 대중을 만날 길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대중의 심판조차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인디 문화를 잠수함 속의 토끼로만 머무르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297-298P)
어느 정치인의 연설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의해 동시 중계된다고 생각해보자. 그 정치인의 연설을 라디오로 듣거나 텔레비전으로 보고 듣거나 메시지는 동일하다.(335P)
아니 이게 어떻게 동일한가. 라디오는 화자의 비언어적인 것을 제외한 목소리로 된 메시지만 제공하는 반면 텔레비전은 화자의 제스처, 표정 등 비언어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이걸 어떻게 똑같은 메시지를 제공한다고 보는지?
기술적으론 전자우편이 팩스에 비해 훨씬 우월하지만, 팩스가 더 편리한 점도 있다. 팩스 전송을 받으면 팩스 용지를 뽑아 복사하거나 자기만의 표시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거나 밑줄을 그어 반송할 수도 있다. 즉, 자기가 받은 데이터와 물리적인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네이스비트는 이것이 바로 하이터치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자우편의 경우에 하이테크는 있지만 하이터치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352-353P)
이것도 웃기는 소리다. 이메일로 받은 걸 전자상으로 볼 수 있지만 출력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팩스가 가능한 모든 것은 이메일에서도 역시 가능하다.
베블렌 효과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소비행위임이 틀림없지만, 중요한건 바로 이것이다. “호사스러움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아서는 안 된다. 남들이 알아줘야 한다.”
비슷한 것으로 속물 효과가 있다. 이는 “자기만이 소유하는 물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소비 행태”다.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물건, 즉 희소성이 있는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더욱 만족하고 그 상품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 소비를 줄이거나 외면하는 행위다.
중류층과 상류층은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중류층이 상류층을 쫓아가면 상류층은 기분 나쁘다며 다른 곳으로 숨는다. 예컨대, 20세기 초에는 화장품의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상류층 여성들만 사용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말쯤에는 화장품의 값이 저렴해지자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까지 화장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화장품을 많이 사용하면 상류층이 아니라 노동 계층이라는 표시가 되었다. 이에 상류층 여성들은 어떻게 대응했던가? 그들은 화장품을 계속 사용하기는 했지만 훨씬 절제된 방법으로 사용했으며 세련되고 비싼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중하층 여성들과의 차별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오늘날 유행의 사이클이 빨라진 것도 그런 숨바꼭질 놀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류층은 중류층이 쫓아오면 숨어버리고, 중류층이 상류층이 숨은 곳을 찾아내면 얼마 후 또다시 숨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낸시 에트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류층은 패션 추구자들로, 그들 중 가장 보수적인 사람도 특정 스타일을 입도록 이끌리게 된다. 그 이유는 오로지 그 스타일이 너무 유행이라 그것을 입지 않으면 관행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상류층은 그들을 모방하는 중류층으로 오인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한 패션이 그들에 의해 도입되자마자 그들이 그 패션을 포기하는 이유다.
(...)
값이 비쌀수록 명품의 로고는 더 작아진다. 명품을 찾는 중류층이 많아진 탓에 생긴 차별화 욕구로 빚어진 결과다.
(...)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면 왜 비싼 돈을 주나? 그러나 안심하시라. 자기들끼리 그리고 그 근처에 가까이 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게다가 그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능력이 대접받기 때문에 이건 아주 재미있는 수수께끼 놀이가 된다. 그래서 생겨난 게 바로 노노스족이다.(405-409P)
ㅡ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中, 인물과 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