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中, 사이행성

mediokrity 2017. 10. 24. 12:23

2017/10/23

 


1. 그동안 본인에게 ‘페미니즘’이란 어떤 것이었나요? 책을 읽은 소감은 어떤가요?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고 사회화과정에서 편견이나 차별적 관점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로인해 철저히 비장애인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게 당연시 됐다. 이와 같은 가부장 중심의 성차별주의를 해소하고 함께 잘 살자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소감은 우선 많은 페미니즘 이론서들이 학술적인 용어나 생경한 단어 사용으로 처음 접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될 수 있으나 이 책은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모름지기 페미니스트라면 삶의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자타에 의해 받기 쉬운데, 그들에게 조금의 숨 쉴 틈과 위안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자신의 모든 행동을 그런 식으로 타협하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셋째, 저자는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영화, TV쇼, 스탠드업 코미디, 드라마, 시트콤 등등 대중문화일반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걸로 보이며 이 책을 읽을 독자가 영미권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이 있다면 풍부한 사례를 통해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좋았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영미권 대중문화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 페미니즘은 사전적으로 여성의 권리,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이론이라고 정의됩니다. 여성주의자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정의내립니다.

성차별주의와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 중에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3가지 억압을 명확히 구분해 말하긴 힘들다.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억압은 너무나 많지 않나.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여성혐오 살인, 여성혐오 발언(가임기 여성 지도, 흔한 랩퍼들의 여성 혐오 가사, 편집 단계에서 걸러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송되며 오히려 개그포인트라고 까지 생각하는 연예인의 여성혐오 발언), 데이트 폭력, 육아에 대한 인식, 명절증후군 등등. 이건 뭐 착취와 억압을 넘어 혐오의 감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제적 억압은 임금의 격차를 얘기할 수 있다. 2016년 통계를 기준으로 14년 연속으로 OECD 중 남녀 임금격차가 최악이다. 실제 남녀가 똑같은 상황인데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30%이상 많다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여성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통계상 허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통계를 살펴보면 남녀 모두 첫 직장을 가질 무렵인 20-30대에는 임금의 격차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여자가 조금 많다가 시간이 지나며 여성이 남성 임금의 절반 수준밖에 받지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결혼과 출산. 출산을 겪으며 경력이 단절될 수밖에 없고 재취업은 요원하다. 그리고 독박육아가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거의 여성 혼자 아이를 키우려다보니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진입할 확률이 매우 크다.

 

 

3. 대한민국 모자보건법 제14조는 ①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또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②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③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④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 또는 배우자의 동의를 조건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법상 낙태죄가 적용됩니다.

임신, 출산에 관한 여성의 결정권을 존중하여 사회적, 경제적 원인으로 인한 임신중절도 허용해야할까요?

 

네. 허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유권을 특정 항목의 법으로 구속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왜 허용하면 안되나? 허용하면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낙태천국이 될 것 같나? 어차피 낙태를 할 마음이 있거나 있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시도하거나 시도 해왔을 것이다. 하나의 사례만 들어보자.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하에서 낙태 전면 금지로 인해 약 50만 명의 여성이 불법적인 경로의 낙태시술 도중에 죽어나갔다. 더군다나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합법적인 통로를 막아 놓으면 자연스레 음성화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여자를 인간 낳는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태아와 인간 중 누구를 더 우선시해야 하는지 분명할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태아를 몇 개월부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물어본다면 그건 또 따로 얘기를 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1일이 됐든 10개월이 됐든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와 이미 존재하는 인간 중 누구를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4. 강간문화는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용인하는 환경, 강간이 만연한 환경,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됩니다.

 

-1) 강간문화와 성차별주의는 비례하는 관계일까요?

정비례. 진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이 좋았다.

 

-2) 강간문화가 교정이 필요한 문화라고 한다면, 사회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최근의 미국 영화계의 사례를 들어보자. 하비 와인스킨 성추문. 힘의 균형이 10대0일 정도로 자신의 직업분야에서 거물이 이제 막 발돋움하는 신입에게 자신이 시키는대로 하면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며 각종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을 때 뿌리치기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 업계를 떠날 게 아닌 이상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를 계속 볼 수밖에 없고, 여러 형태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신고하기도 어렵다. 이런 이유로 문화계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남자가 자신의 지위와 힘을 통해 여성을 성추행하는 경우가 대단히 빈번함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5.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

 

아니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론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이라는 실천의 영역 모두에서 힘쓰는 사람일 텐데 나는 단지 입으로만 떠들고, 이렇게 글로만 적는다. 사적인 영역에서야 어느 정도 발언하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나 무지를 깨우쳐줄 수 있겠지만 역시 귀찮은 일이다. 설득을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닌 이상 설득은 번거롭고 지난하다. 나는 성격이 병적으로 급하고 흥분을 잘해서 결국은 혼자 씩씩거리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더라. 내가 조리있게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내 감정은 진중권의 불멸의 어록에 담긴 감정과 유사하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냥 알고라도 있자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한정할 것 없이 한남 기준으로 현 시대에서 살아가는 태도가 평균은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남 수준이 워낙 처참하다보니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칭송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은데 사회의 수준이 낮아지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여기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친구, 여동생, 엄마, 이모 중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었으나,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남자 친구와 함께 ‘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결정했다. 그녀는 원한다면 낙태할 수 있다고 믿는 낙태 합법론자였을 수도 있겠지만 임신 소식을 듣는 순간 자기의 몸에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는 이제까지 낙태 합법 찬성론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만약 그녀와 남자 친구가 아이에게 좋은 삶을 약속하지 못했다면 낙태를 했을 것이다. 이런 그녀가 임신 27주에 부엌에 있다가 하복부에 통증을 느껴서 쓰러졌는데 하혈이 멈추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병원으로 달려간다. 의식을 잃는다. 일어났을 때 그녀 안에 있던 아이는 사라졌다. 그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이후 수년 동안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해보자. 이것이 바로 임신과 출산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한 여성의 삶과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선택은 이루어졌다. 선택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여성이 생명의 고귀함을 위해 이 선택권이 희생되어야 하는 주에 살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녀가 생명의 거룩함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때는 누가 그녀의 이야기를 해줄 것인가?

(...)

로빈 시크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노래한다. 그래, 괜찮아. 넘어가자. 다니엘 포쉬는 팬들에게 여성의 아랫배를 가볍게 만지고 그 장면을 녹화하라고 말했다. 그래, 넘어가자. 켄 호인스키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했다.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는 웬디 데이비스 민주당 상원의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싱글맘의 딸입니다. 또한 십 대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텍사스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모든 생명은 태어날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단 말입니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 넘어가자. 오하이오에서는 낙태를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반드시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고 낙태 합병증이 있을 때는 일반 병원이 아닌 개인 병원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런 갖가지 법안을 만드는 전국의 입법자들은 다 여성을 보호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요.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하고 싶어 하니까요. 여자 엉덩이를 움켜잡고 싶을 때는 빼고 말이죠.(28-29p)

 

 

우리 사회가 당신을 망쳐놓은 것이다. 전적으로 그렇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크리스 브라운이 여자 친구를 죽기 전까지 때리고도 고작 집행유예를 받고 2012년 그래미 무대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그 시상식에서 올해의 베스트 R&B 앨범 상을 받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재기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나쁜 남자 페르소나를 자랑스럽게 게시했고 대중들을 비웃었다. 그는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팝 음악계 악동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변명이 아니라 설명이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찰리 쉰이 켈리 프레스톤에게 ‘실수로’총을 쏘고, 섹스를 거부한 UCLA 학생의 머리를 때리고, 전 아내 데니스 리처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전 아내 브룩 뮐러에게 칼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영화에 출연시키고 텔레비전 쇼에 출연시켜 돈을 찍어 내게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놓았다. 범죄를 저질러 30년 이상 미국 입국이 금지된 로만 폴란스키에게 아카데미 상을 두 번이나 주었기 때문이다(13세 소녀에게 술과 약물을 먹여 성관계를 함).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마돈나를 폭행하고도 계속해서 비평가들의 극찬 속에 영화를 찍고 두 번이나 아카데미 상을 받은 숀 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유명한)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도 법적, 직업적, 개인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살도록 내버려 두면서 당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버렸다.(45-46p)

 

 

해결 방법은 있다.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된다. 여성들이 출판계를 휘어잡고 있다는 말을 안 하면 된다. 젠더 불평등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형 출판사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된다.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최고의 글만 출판하고 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탁월한 여성 작가들이 많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더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출간해야 한다. 여성들이 당신의 출판사나 언론에 글을 잘 기고하거나 발표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묻고 혹 불편하더라도 답을 구하려고 애써라. 여성 작가들에게 더 손을 뻗어라. 그 여성이 당신의 청탁이나 부탁에 응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성들을 찾아라. 계속 그렇게 하라. 남성 작가들의 책과 여성 작가들의 책이 같은 비율로 리뷰를 받는지 확인하라. 재능 있는 여성들을 수상 후보에 올려라. 당신의 분노를 잘 처리하라. 편견을 잘 다루어라. 젠더 문제를 무시하려 드는 이들에게 저항하라. 노력하고 노력하고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우리가 더 이상 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노력하라.

변화하려면 의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변한다. 그렇게나 간단하다.(49-50p)

 

 

나는 언제나 모범생이었다. 성적표에는 항상 A가 찍혀 있었고 반에서 늘 1등이었다. 순종적인 아이였다. 어른들에게 공손했고 동생들에게도 착한 누나였고 주일 학교에도 다녔다. 이런 내가 뒤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우리 가족을 속이고 모든 사람을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나쁜 짓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62P)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인생은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어린 영혼에게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들이민다는 것을 배웠다. 자상한 부모님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고 있던 착한 딸들에게도 말이다. 당신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 숲 속의 소녀가 될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붙여준 이름 때문에 진짜 이름을 잃을 수가 있다. 당신 같은 소녀들이 등장하는 책을 찾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책을 읽은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구원도 있었다. 책을 잃고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나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경험에서 나를 끌어내 주었다.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다른 결말과 더 나은 가능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66p)

 

 

영화나 방송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학 비평에서도 작품 안에서 호감 비호감을 따지고 있다는 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항상 구애를 하고 친구를 물색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진다. 문학 작품 속 캐릭터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은 그 캐릭터들이 우리의 변덕스럽고 각양각색인 기준들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조차 나와 유사성이 있는 누군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문학적 가치가 우리가 읽고 있는 책 안의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거나 그 사람과 사귀고 싶다거나 하는 기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

문학 비평에서도 작가들은 어떤 캐릭터가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마치 그 캐릭터의 호감도가 소설의 우수함과 비례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그런 기준을 적용하려 한다. 우리 실제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조차도 여자들에게 남자와는 다른 법칙을 세워 놓는다. 실제로 만나면 기겁할 정도로 싫은 남자가 안티히어로로 등장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

만약 독자들이 친구를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겁니다. 책에서는 인생을 찾아야 해요.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문학 작품에 어울리는 질문은 “이 사람이 내 친구가 될 가능성이 있나?”가 아니라 “이 사람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가?”하는 겁니다.

(...)

쉽게 호감이 가지 않은, 어쩐지 싫어지는 캐릭터들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이자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어쩌면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고 우리의 숨겨진 모습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내 단점을 다 드러내며 사는 것이 두렵고 겁이 나서 그럴지도 모른다.(83-87p)

 

 

세상의 기준에 영합하지 않은 작가는 스미지가 죽어 간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의 순간을 갖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우리에게 스미지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더 문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91p)

 

 

그날 밤 브룩클린 파티에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여자, 닉이 원하는 여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쿨한 여자’. 남자들은 이것을 언제나 최고의 찬사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쿨한 여자야. 쿨한 여자는 섹시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축구와 포커, 지저분한 농담, 트림을 좋아하고,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며, 싸구려 맥주를 마시고, 스리섬과 항문 섹스를 좋아하며, 지상 최대의 음식 윤간 쇼라도 주최하는 것처럼 핫도그와 햄버거를 입 속에 쑤셔 넣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xs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다. 무엇보다도 쿨한 여자는 섹시해야 하니까. 섹시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 쿨한 여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화가 나도 사랑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남자가 뭐든 자기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 마음대로 해, 날 무시해도 괜찮아, 나는 쿨한 여자니까.

남자들은 정말로 이런 여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은 속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수많은 여자들이 기꺼이 그런 여자인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96p)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여성들은 분명 이전보다 능력 발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 국방부 장관이자 2016년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아직도 패션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있다. CNN방송국은 여성 유권자들은 투표할 때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는 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있다.(130p)

 

 

미국 여성 최초 우주인 샐리 라이드가 2012년 7월, 61세로 별세했을 떄 그녀의 곁에는 23년간 같이 살았던 여성 파트너가 있었다. 라이드는 사망했지만 그녀의 미망인은 배우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하는 연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샐리 라이드는 우주로 날아가 별에 닿을 수는 있었지만 여기 지구에서 그녀와 고락을 함께 한 동반자는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159p)

 

 

그날 기분에 따라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니고, 혹시 가볍게 결정 내렸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의 권리이다.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아무리 입이 아프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다. 이렇게 인생을 결정하는 큰 문제 앞에서는 여성의 선택권에 외부의 찬성이나 반대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논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지금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권리는 양도할 수 있고 놀라울 정도로 자주, 정기적으로 양도되고 있다.

나의 신체가 입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다. 가끔은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이다. 미국 시민으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권리가 있다고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몸이 내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신체가 법률로 제정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자유가 없다. 이사벨 카핀은 <여성의 신체를 법제화하기 : 생식의 기술과 재편성된 여성>이란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여성의 신체를 제한하는 과정에서 입법자들이 여성의 신체의 형태와 한계까지도 법으로 제정하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정치가들과 도덕론자들이 여성의 신체의 형태와 한계까지도 정의하려고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자유는 꼭 가져야만 한다. 그 자유는 신성불가침이어야 한다.(214-215p)

 

 

정치가들이 얼마나 기억력이 나쁜지를 깨닫고 또 한 번 놀란다. 그들이 중절 수술이 불법이었을 때나 중절 수술이 가능하지 않았을 때 임신을 종결시키기 위해 여성이 어디까지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여성들은 유산하기 위해 계단을 구르고 자해를 했다. 왈도 필딩 박사는 <뉴욕타임즈>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산을 위해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이 사용되었다. 바늘로 찌르고, 코바늘로 찌르고, 식탁용 소금 그릇과 소다병을 사용했다. 때로는 위쪽이 깨진 것들이었다.” 여성들은 비누와 세제와 카테터와 자연 치료를 시도했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만약 우리가 구석으로 몰리면 또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 사회는 여성들에게 그런 책임을 부과했다.

우리 여자들의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 수치스럽게도 우리의 권리는 언제나 양도할 수 있는 권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220-221p)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고 그것이 인종에 따른 편견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간이다. 결함투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형성된 문화적 조건화의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조금씩은 인종 차별주의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들 kkk에 합류하거나 십자가를 불태우거나 모스크 사원을 파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중에 좀 더 깨인 사람은 완벽히 성공하지 못할 지라도 그러한 문화적 조건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버터를 사랑하는 인기 최고의 셰프이자 과거 푸드 네트워크의 스타였던 폴라 딘처럼 노력하지 않을 수도 있다.(222-223p)

 

 

언제, 그리고 누구와 있을 때 인종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굉장히 복잡한 매트릭스가 존재한다. 대외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고, 사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친구들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어디에서도 하지 않아야 할 말도 있고, 공적인 자리에서 절대하지 않아야 할 말이 있다. 소설가 테주 콜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딘의 녹취록에 흥분하는지에 대해 트위터에 이렇게 남겼다. “폴라 딘이 뉴스에 나오는 이유는 그녀가 인종 차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암묵적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규칙에 친숙하다. 우리는 사실 모두 조금씩은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인종 편견은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언제 드러내느냐의 문제이다.(225-226p)

 

 

트레이번 마틴이 피부색 때문에 살해당한 최초의 흑인 남성도 아니고 최후의 흑인 남성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른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한 청년을 위한 정의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 그 정의는 그 일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배웠는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여기서 위대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위대함이란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트레이번 마틴이란 청년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부족한 우리 자신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망토 같은 것은 갖지 못한, 하늘을 나는 것은 고사하고 가게에서 집으로 걸어가지도 못하게 된 흑인 젊은이일 뿐이었다.(239-240p)

 

 

우리는 흑인스러워야 하지만 너무 흑인스러우면 안 되고 너무 말 많고 시끄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부르주아를 따라해서도 안 된다. 흑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온갖 종류의 선입견이 있고 이 선입견들 또한 자꾸 변한다.

물론 우리 모두 겉으로 큰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정형화된 이미지가 싫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제모를 하지 않는다. 남부 사람들은 인종 차별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깰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럴 수가! 고정관념이 깨지면 싫어한다.(241-242p)

 

 

내가 어떤 사람들과 결정적인 공통점을 가진 동시에 아무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268p)

 

 

이 흑인 학생들을 만나며 일찌감치 알아챈 것이 있었다. 대학이라는 곳에 온 많은 흑인 학생들이 읽을 줄을 모르고 공부 방법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또 지성인들의 모임에서 특권을 주제로 토론할 기회가 많았고,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특권층이며 이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비교적 여러 혜택을 입으며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부분 디트로이트 중심가 출신의 이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입은 혜택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입 닥치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내가 그거 모를 줄 알아요? 나는 혜택을 입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영향받지 않는 척하며 내 상태에 만족하는 것만이 특권일까?

(...)

그 전에는 이 나라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교까지 입학한 학생들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럽다. 이 나라 아이들의 교육 수준이 믿기 힘들 정도로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에 무지했다. 부끄럽다. 나는 그 시절 강의실에 동기들과 둘러앉아 문학 이론이니 사조니 하며 떠들 때보다 교실 밖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배웠다. 아직도 나의 편견과 관점들을 수정하려고 계속 노력 중이다.(270-271p)

 

 

 

ㅡ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中, 사이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