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박지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中, 사계절

mediokrity 2018. 1. 17. 17:04

2018/1/15

 

 

너무 말을 많이 한 날엔 혹시 실수를 하진 않았는지 염려가 들기도 하지.(67p)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서 꼼짝하지 않는 바퀴니까.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만 멈춰 있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179p)

 

 

정원사가 무안해할까 봐 그 자리에서는 아무 내색도 안 했지만 니스는 집으로 들어와서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라니, 언제 적 어휘를. 그러나 정원사의 순진한 태도를 재미있어하던 니스는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서 차츰 웃음을 잃었고, 방에 들어와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완전히 굳은 얼굴이 되었다. 어린 시절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희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는 1직 도련님들이라서 좋겠어.’

열여섯 살 때 자신 역시 제이와 버즈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친구들을 도련님이라고 느꼈던 그때 그 마음을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을까.(183p)

 

 

자신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한 아버지도 다윈을 생각해 그 일을 다신 꺼내지 않을 것이다. 우습지만 가정의 평화란 상당 부분 이렇게 한쪽의 묵인과 다른 쪽의 동조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220p)

 

 

진실의 가치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진실이다.(429p)

 

 

그렇다고 제이가 꽉 막힌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제이는 기본적으로 장난꾸러기였다. 특히 동생인 조이에게는 어리다는 이유로 짓궂은 장난도 자주 쳤다. 한번은 밧줄로 동생을 나무에 묶어 놓은 적도 있었다. 조이가 우는 것을 보고 내가 제이, 이런 건 죄가 되지 않는 거야?”라고 물었더니, 제이는 길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건 죄가 되지만 야구를 하다가 남의 집 유리창을 박살 내는 건 죄가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제멋대로식 재판같이 여겨지기도 했지만, 제이는 유리창을 박살 내는 것엔 숨길 의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숨길 의도가 있는 일만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야구를 하다 남의 집 창문을 깨뜨린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공을 찾으러 가서 사과하면 화를 내는 집주인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잘못을 고백하러 온 우리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겼다. 제이는 우리가 잘못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동생을 놀리는 것 역시 숨길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놀이이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현명한 제이는 인간의 죄의식이 숨김에서 태동한다는 것을 벌써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468p)

 

 

박지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