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이언 매큐언, <체실 비치에서> 中, 문학동네

mediokrity 2015. 8. 16. 05:34
2015/7/4

곱씹어볼수록 대단한 소설이다. 소재의 참신성과 특이성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처음 읽었을 때는 결말이 흐지부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어볼수록 마지막 부분이 좋다. 에드워드가 그일 이후의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그때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회한은 너무나도 쓸쓸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와 켄튼 생각도 났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함의하는 것처럼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한 시간의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어떤 부분까지 내보이며 이야기해야 하는가? 나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내가 의도한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같은 상황에서의 남녀의 생각이 이렇게도 판이할 수 있는가? 와 같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여러 층위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흥미로웠다.


늘 그랬듯이, 플로렌스는 가족에게 자신의 감정을 감쪽같이 숨겼다. 딱히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내색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늘 그냥 방을 나와버렸고, 나중엔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심한 말이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는 밤새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신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늘 스스로에게 상기시켰고, 그렇게 자신을 속임으로써 더 완벽하게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흔히 아주 심하게 싸운 뒤에도 곧 화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요령을 몰랐다. 그녀는 분위기를 일시에 바꿔놓을 수도 있는 그런 싸움을 할 줄 몰랐고, 심한 말이 취소되거나 잊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했다. 뭐든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최고였다. 그녀는 신문 만화에 등장하는, 귀에서 김을 뿜어내는 만화 캐릭터처럼 열이 올라올 때조차 그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65p)

그녀는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준 적도 없었다.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남들과 공유한 적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묘한 느낌을 맛보았다. 자신이 혼자라는 그 느낌을.(105p)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의견 차이가 날까봐 두려워했고, 이제 그의 분노가 그녀를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있었다. 그와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는 그의 감정을 해치고 싶었고 혼내주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 안에 깃들어 있는, 파괴의 쾌감을 향한 너무도 낯선 충동이었고, 그녀는 그것에 전혀 저항감이 일지 않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말하기 전까진 살면서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이 무자비하고 경이로운 말들을 할 참이었다.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녀를 비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엄을 총동원하고 있었다.(174~175P)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도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196~198P)

ㅡ 이언 매큐언, <체실 비치에서>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