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강화길, <다른 사람> 中, 한겨레출판
2018/10/24
오늘날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폭력(그게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을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많은 사건을 극화해서 보는 느낌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복잡한 마음도 들었는데, 이런 사례에 한국에서 비장애인 남성으로 태어나 30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볼까. 자신이 평균이상의 공감 능력, 도덕성, 지성 등을 겸비하고 있고, 책 속의 등장인물과 조금의 공통점도 없다고 믿으며 그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각 인물에 대해 이러저러한 점을 비판하고 지적하면 된다. 아울러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공포와 폭력에 대해 나는 너희들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감정이입까지 하면 금상첨화겠다. 근데 그러할까.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한 기사 몇 줄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 몇 권 읽었다고 페미니스트라 설치는 게 우스운 것처럼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이 겪는 문제에 깊이 통감한다며 고뇌하고 있는 꼴을 하고 앉아 있으면 여성이 보기에 얼마나 같잖을까.
세상에, 서운했다. 일부러 전화를 피했으면서 막상 벨소리가 끊기자 이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외로움이 거세게 밀려오며 속이 울렁거렸다. 내 마음은 이토록 뻔하고 지루하다.(12p)
다들 이렇게 스스로에게 계속 확신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언젠가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한 순간, 더 쉽게 와르르 무너질 테니.(19p)
병에 걸린다는 건, 내 행복을 남에게 맡겨놓는 것과 마찬가지야. 불안하고 끔찍하지.(85p)
이강현은 그와 비슷했다. 그녀가 선택하는 프로젝트, 발표 논문 주제, 학교의 인맥 모든 것이 실리적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그녀를 우습게 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동기나 선배 들은, 일명 ‘학문에 영혼을 바치는 연구자’들은 이강현 같은 사람 때문에 진짜 실력자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공부보다 정치가 우선이고 학문의 순수성보다 이득이 남는 학교 사업에 힘을 쏟는 것이 무슨 꼴이냐고 말이다. 그들은 이강현 때문에 안진대학이 발전할 수 없는 거라고 분노했다. 동희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의견에 반발해서 척지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 앞에서는 적당히 인상을 쓴 채 회의와 고뇌에 빠진 젊은 학자 코스프레를 했다. 하지만 동희가 진짜 경멸하는 이들은 바로 학문에 영혼을 바친 그들이었다. 학문, 열정, 대학의 본질? 그는 학문 자체가 좋아서 공부를 한다는 식의 말을 경멸했다. 인간의 언어란 정말 대단했다. 본질을 감추고 외피를 만드는 데 언어만큼 적당한 건 없었다. 진실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따라붙는 무수한 수식어는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다. 학문이란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이 세상이 남겨놓은 인간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냉혹한 자기 검열을 해가며 학문이란 무엇인지 계속 탐구해야 한다고? 오직 성과만이 선이 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학문은 늘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고?
그러나 그렇게 토로하는 이들이 진짜 원하는 건 이강현의 자리였다. 그들이 이강현을 싫어하는 건, 그 자리에 그녀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인정받고 대접받아야 할 학문의 기사인 ‘내’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이겠지. 동희가 보기에 자신의 인정 욕구와 학문에 대한 사랑을 구분 못 하는 어설픈 학구파들보다 이강현이 훨씬 유능한 사람이었다.(105-106p)
현규는 절대 몰랐다. 그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고, 모두에게 대접받는 사람이니까. 그의 단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어떤 일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 그는 자신이 나서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남자였다.(168p)
수진은 믿지 않았다. 사람들의 악의가 두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수진이 믿지 못하는 건 악의라기보다는 형체 없는 목소리들이었다. 오히려 악의는 믿을 수 있었다. 적어도 악의는 분명한 의도와 형체를 갖고 있으니까. 팔현에서부터 들어온 그 목소리들. 무심한 목소리로 수진을 가리키던 말들. 춘자 딸, 날라리 딸, 불쌍한 년. 마을 사람들은 착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말을 했을 때 수진이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바닥에 돌멩이가 있어! 수진은 엄마 닮아서 멍청할 거야. 와, 하늘에 비행기가 간다. 춘자는 아마 다른 게서 또 자식을 낳았을 거야. 겨울이다! 눈이 와! 세상에, 수진이가 대학에 가? 사람들은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남자는 수진을 강간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203p)
“괜찮아,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은 없었어. 그리고 남자들은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 정말 다정해. 나는 그게 좋아.”
수진은 마음이 답답했다. “원하는 걸 얻고 나면 너를 함부로 대하잖아.”
(...)
“다들 왜 나를 끝까지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언제든지 마음을 열 것 같아서 쉽게 다가서지만, 너의 깊은 외로움을 알고 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아마 그렇기 때문일 거라고 수진은 말하지 않았다.
(...)
그들은 이마를 맞대고 잠들었다. 그날 잠에 빠져들면서, 수진은 오랜만에 진아를 떠올렸다. 수진은 진아가 자신에게 멀어졌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230-231p)
“어린 남학생들이 아직 절제를 배우지 못해서 그래.”
개소리다. 이강현은 오빠를 믿었다는 여학생들의 울음소리 못지않게 남자는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걸 참는 게 힘들다는 말을 경멸한다. 이건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259p)
김동희가 그렇고 그런 놈인지는 진작 알고 있었다. 본인이 남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전형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놈. 위로 올라갈 생각으로 가득한 놈. 야망이 크고 과한 노력을 하는 놈. 그런 놈의 특성은 매우 단순하다. 상명하복에 충실하다. 세상을 그 틀에 맞춰 본다. 김동희는 자신이 모실 사람과 무시할 사람을 철저하게 구별한다. 김동희는 매번 모든 자리에서 최우선으로 대접하는 인물들이 다르다. 어떤 자리를 가든지 순식간에 서열을 매기니까. 항상 자기가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김동희는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김동희는 학교 신문에 여자들을 존경한다는 칼럼을 썼다. 어두운 폭력을 빛으로 바꾸는 존재라고. 여자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존재들을 경멸한다고. 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지 모르니 늘 긴장을 한다고.
‘여자들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의 진짜 얼굴을 몰랐을 것이다. 여자들은 항상 나를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게 해준다.’
이강현은 웃음이 나온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라는 칼럼에서조차 자신이 얼마나 평등주의자인지 보여주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 학교에서는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칭하고 싶어 한다. 좋아 보이는 게 뭔지는 알아서 냅다 챙겨두고 싶은 거지.
페미니즘을 논하는 남자 교수들은 여성 인권까지 신경 쓰는 진보주의자로 통하지만, 여자 교수들이 페미니즘을 논하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꼴페미가 될 뿐이다. 김동희가 영리하기는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동희에게 제법 속는다. 친절한 김동희, 성실한 김동희, 오, 뚝심 있는 김동희, 실력 있는 김동희. 그런 건 이강현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강현은 김동희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이강현은 남자를 믿지 않는다. 물론 여자도 안 믿는다. 다 귀찮다. 이강현은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관심 없다.(260-262p)
이강현은 혼자 깔깔 웃었다. 내가 뭐라고? 꼴페미가 아닌 진정한 페미니스트. 그렇지, 그렇지. 이강현은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독립적인 여자.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할 용의가 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크게 나서지 않지만 돈을 공평하게 나누어 내고, 음담패설이나 성희롱 가까운 농담에 화내지 않고, 남자들이 2차에 갈 때 눈치껏 빠지며, 최근의 여성운동이 과하다고 지적할 줄 알며, 더 중요한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그들이 허락한 페미니즘을 수행하는 페미니스트!(265-266p)
내가 아쉬워하는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데, 정작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나를 아쉬워했다.(280p)
ㅡ 강화길, <다른 사람>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