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中, 사계절
2019/1/5
평소에 고민하던 부분도 다루었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존재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과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열등한’ 혹은 ‘잘못된’ 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필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 왜 나는 이렇게 키가 작지? 왜 내 지능은 좋지 않지? 왜 나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만성피로증후군을 타고난 거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118-119p)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는 가진 자들의 은혜적 배려가 아닌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사회적 책무로서 막연히 예산상의 이유만을 들어 그러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다. ·····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어 비장애인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조차 논의하지 아니하는 이동권이 단순히 예산상의 이유만으로 제약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모순일 수밖에 없는 바, 이러한 모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문제로서 조그마한 노력과 비용의 부담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므로 더는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시기를 늦출 수는 없다고 할 것이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이동권마저 비장애인과의 형평성 및 예산상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그 시기를 늦추려고 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233p)
스티브는 ‘디보티devotee’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디보티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을 ‘디보티즘’이라 부른다. 스티브는 다리 부분이 절단된 장애 여성이라는 사실 외에 앨리슨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지만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디보티즘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은 저마다 다르지만, 신체 일부가 절단된 몸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마비가 있거나 근육이 적은 신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보청기나 휠체어같이 장애인들의 보장구에 끌린다. 주로 이성애자 남성 디보티가 많지만 동성애자도 있고 성별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장애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으로 분류하며, 이를 장애가 있는 사람을 욕망하는 디보티, 장애가 있는 척하는 사칭가pretender, 아예 장애인이 되고 싶은 워너비wannabe라는 세 범주로 나눈다. 귀가 안 들리는 척 보청기를 끼고 살아가고, 실제로 장애인이 되기 위해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청력 손실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257p)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 비서양 사회의 인간을 그 인간의 지적, 도덕적 실존을 무시하고 사회과학적으로 분석될 대상으로 보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서양인을 확실히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바로 그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도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리엔탈리스트 또는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가진 자에게서 제거하기 힘든 자기기만을 가져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비서양인을 대당 이상의 존재로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261-262p)
ㅡ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中,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