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마쓰이에 마사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中, 비채

mediokrity 2019. 1. 6. 15:31

2019/1/6

 

 

, 저게 저렇게 된 것도, 이게 이렇게 된 것도 내 탓 아닐까. 전생의 인연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사고방식은 요컨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만 나올 수 있는 거라고. 바꿔 말하면 자기를 과대평가한다는 거지. 전봇대가 큰 것도 우체통이 빨간 것도 전부 내 죄입니다, 하는 건 자기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상과 마주 보길 포기한 어리광쟁이가 하는 말이야.(43p)

 

 

하마터면 연설을 할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었다. 헤어진 아내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지 않아도 돼. 감탄이 나오게 설명해주는 평론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입 다물고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게 의지가 되는 남편 아냐?(97p)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펑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 공원을 산책하고 그 김에 동물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거나 가나가 부탁한 장을 보거나 한다. 저녁이 되면 마음에 든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가볍게 마시고, 가나가 집에 올 즈음에는 직접 물을 받아 목욕하고 NHK<뉴스워치 9>를 보고 나서 취침.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가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다 셰어하우스의 주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담백한 관계였다.(103p)

 

부녀간의 관계만 담백할 뿐만 아니라 노년이 꿈꾸는 이상적인 생활 형태 중 하나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늙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역시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란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겠지. 운동을 합시다.

 

 

아들에게도 언젠가 배우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 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119-120p)

 

 

가나를 도와주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부르면 달려 올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누가 답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 감정에 화살표를 붙일 수 있는 어떤 전망이나 방향성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상황에 맡기고 그때그때 대응해봤자 이내 지칠 대로 지쳐 진이 빠질 것이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발을 움직인들 허공을 저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134p)

 

 

 

마쓰이에 마사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