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中, 북라이프
2019/1/16
그다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종종 걱정된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내일 당장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지? 늙거나 병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누가 나를 돌봐주나? 하지만 이내 남편과 직장도 그리 믿음직한 대책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족도 돌아서면 남이고, 직장에 충성해봤자 회사가 망하거나 나이 들어 내쫓기면 일찍 독립한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다. 또한 ‘나 아니고 여기 아니어도 갈 데 많은 사람’이라는 긴장이 없으면 상대에게 무심해지는 게 관계의 생리라, 결혼을 하건 회사를 다니건 자립의 기반은 있어야 한다. 그럼 결국 지금과 다를 게 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 돈이나 열심히 모으자, 결론은 늘 그렇게 난다.
마지막 불편은 외로움이다. 매일 얼굴 보고 시시콜콜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게 가끔은 막막하다. 상세한 설명 없이도 내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오늘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아주는 사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게 가족이건 동료건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딸린 한 무더기의 부록은 원치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기를 필요는 없다. 게다가 혼자 놀아버릇하면 그것만큼 편한 게 없다.(7-8p)
혼자라도 침대는 퀸 사이즈를 쓴다. 그래야 편하다.(17p)
이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혼자 산다는 건 마냥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그건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보살피고, 공과금을 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집주인이나 이웃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35p)
우리가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흥미로운 무언가에 자원을 쏟아부으려 할 때, 우리가 실패하고 다치고 망하고 상처받을까 봐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내가 실패하고 망함으로써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소중한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족쇄다. 가족이란 대개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포기한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후회로 남는다.(79p)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도망칠 공간이 있다는 것, 의무와 무관한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일들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대척점에는 바로 지금 여기,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집단이 우주의 전부인 줄 아는 터무니없이 비장한 부류들이 있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세계가 관짝처럼 쪼그라들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98p)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게 생긴 얼굴이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소심하고 게으르고 내성적인 기질을 신중함으로 위장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미지는 그렇지만 사실 나는 책과 그리 친하지 않다. 집중력이 부족해서 눈으로는 글자를 더듬으면서 머리로는 딴생각을 할 때가 많다. 독서나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백날 책 읽고 여행 다녀도 멍청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까지나 멍청하고 이기적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활자 시대의 사람인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덜 든다. 그게 내가 책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책을 모으는 데는 더 회의적이다. 나는 책의 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 그것들은 원룸 생활자의 적이요, 이사의 적이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면 이내 팔이 저려온다. 테이블에 놓고 읽으면 제멋대로 페이지가 넘어간다. 독서대에 끼워두면 페이지를 넘기기 번거롭다. 빛바래고 먼지 앉고 벌레 먹은 책들은 호흡기에도 해롭다.(103-104p)
나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행하는 고차원적 활동에 쉽게 감동한다.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추구한다거나 보상 없는 정의를 실천하는 식의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같은 관점에서 토플 성적이나 유학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적 유희로써 공부를 한다는 게 신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112-113p)
한밤에 일어나 흑역사를 떠올리며 이불을 걷어차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외로워도 되나 의문이 들고,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짧지 않은 인생에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어쩌면 이런 식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게 지긋지긋해서 확 혀를 깨물고도 싶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감히 말해본다.(124p)
<아멜리에>에는 지치고 정서적으로 고립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사소한 일에 몰입하며 고독을 견딘다. 하지만 어쩐지 서로를 돕지 않는다. 아멜리에는 다르다. 방법은 서툴지만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되 먼저 손 내밀기, 친절하기, 무기력해지지 않기. 그것이야말로 외로움에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131p)
70쯤 되면 아멜리에 같이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다. 선택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계획을 짜는 것도 귀찮다. 남들은 그 과정을 좋아해서 공항 갈 때까지가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들 하던 데 나는 그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
꼭 여행할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하면 나는 카테고리별 인기 기종들을 조사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리스트로 만들어 비교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광학기술에 관한 논물과 제조사의 사회공헌 여부까지 찾아볼 다음 구입할 모델을 결정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해당 모델에 대한 국내외 온·오프라인 판매처의 가격을 비교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된 구매 후기를 모두 찾아 읽은 끝에 간신히 결제한다. 한동안 식탁을 사려다 각 기후대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차이, 마감도료의 종류 및 유해성 여부, 가구 디자인의 역사까지 흘러가버린 적도 있다. 그걸 지켜보던 누군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
그런 성격이다 보디 여행지 선정부터가 골치 아프다. 여행 잡지에 실린 멋진 사진이나 영화 로케이션, 다녀온 사람들의 추천에 혹해서 ‘그래, 저기야! 떠나자!’ 불쑥 결심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내 ‘기왕 가기로 한 거, 근처에 더 둘러볼 데는 없을까?’ 고민한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느라 며칠 밤을 새워놓고, 막상 신용카드 CVC 입력 단계에 가서 ‘이게 옳은 선택일까? 하루만 더 생각해볼까? 아 몰라, 머리 아파’하고 컴퓨터를 끈 다음 자고 일어나 똑같은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는 순간은 극히 드물지만 이럴 때만큼 끔찍하게 싫은 순간도 없다.
그러다 결국 진이 빠지면 조사 기간 동안 가장 눈에 자주 걸려 익숙해진 지역과 숙소 등으로 대강 예약을 해버린다. 그때쯤이면 여행 계획은 시작과는 아주 달라져 있다.(152p)
낯선 도시에서 카페에 모여 앉아 웃으며 식사하는 무리를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게 여러 번이다. 쳇, 서울 가면 나도 친구 있다 뭐,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면 그때는 더 참고, 더 기뻐하고, 더 의욕을 부려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156-157p)
우리는 여기가 싫어서 혹은 어딘가가 좋아서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여기’ 혹은 ‘어디’가 아니라 ‘떠난다’는 행위 자체다.(218p)
백인들은 백인이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대다수 남자들은 남자가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이성애자들은 이성애가 기본이라 생각하며, 신체에 질병이나 특이점이 없는 사람들은 그게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우월주의고 차별이라는 걸 그 자신이 반대편에 서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한다.(230p)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물음에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통째로 살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소문이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다. 결국 낭설로 밝혀졌지만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239p)
ㅡ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中, 북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