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오한기, <나는 자급자족한다> 中, 현대문학
2019/1/17
다음은 의인법.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198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를 살아가며 2020년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내가 빈곤에 대한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은 곧 바뀌었다. 빈곤은 예나 지금이나 시의적절한 화두였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기아나 아사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정관념만 벗어나면 빈곤은 세련된 소재였다. 이제 빈곤은 무형의 형상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미지든지 가질 수 있었다. 빈곤은 다채로운 형상으로 삶을 다방면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어서 예전만큼 티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근면과 성실이 아니라 로또와 부동산 투기가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살인과 강도가 죄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흙수저가 죄였다. 진보정당을 찍어도 보수정당을 찍어도 중도정당을 찍어도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표어도 진부해졌다. 창의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책은 공정거래, 4차 산업혁명, 정의, 욜로처럼 공허한 단어였다. 우리는 가난한 데다가 공허하기까지 했다. 확신하는데 빈곤은 100년 뒤에도 모든 글의 소재거리가 될 것이었다. 빈곤은 현재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게 했고,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빈곤만큼 고전적이고 동시대적이며 SF적인 건 없었다.(18-19p)
표정을 보아하니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어릴 때 부모님이 칭찬에 인색했죠? 아니면 스킨십이 부족했었나요? 맞벌이에 외동아들 맞죠?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외동아들. 작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작자들이죠. 예전에 몇몇 작가하고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작가들도 다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예외 없이 꽁하고 뚱하죠.(43p)
행복+행복=행복. 행복에 행복을 더하면 두 배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행복이다. 행복은 점점 둔감해지니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행복한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
절망을 계산하는 방법도 유사하다. 절망+절망=절망. 절망에 절망을 더하면 두 배의 절망이 아니라 하나의 절망이다. 각각의 절망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하나의 거대한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절망적인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55p)
제가 겪은 가을 중 남한의 경주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보문호수 곁에 있는 콩코드호텔에 묵으며 불국사를 다녀온 게 기억에 남습니다.(145p)
잃을 게 없어서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가혹한 게 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잃을 게 있는 사람은 그걸 잃으면 되지만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미래를 잃어야 했다.(288p)
내 생각은 변함없다. 언제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슬프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득하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지친다. 셋 중 제일 어려운 건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치는 게 죽음과 가장 밀접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근황에 대해 묻는다.(355p)
ㅡ 오한기, <나는 자급자족한다> 中,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