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中, 문학동네
2019/1/21
아우스터리츠나 토성의 고리는 좀 천천히 읽어야지. 휴.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난 나는 레오폴트슈타트와 요제프슈타트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작은 거리들을 목적도 방향도 모른 채 한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하고 놀란 일이지만, 정처 없는 산책중에 내 발길은 특정한 지역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프라터슈테른 뒤편의 베네디거 아우 공원과 알저그룬트 종합병원을 기점으로 하는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 구역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가 돌아다녔던 경로를 종이 위에 그려본다면, 이성과 상상력, 그리고 의지력의 경계에 가서 부딪힌 다음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삼각과 사각, 그리고 대각선들을 그어놓았다는 인상을 풍길 것이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도시를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르던 방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명백한 경계를 긋고 있었다. 그때의 행동에서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는, 한 없이 걷기만 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완전히 임의로 정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금도 침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35-36p)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57-58p)
나는 낯선 도시에서 식사를 할 만한 식당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일단 내가 너무 까다로워서 몇 시간이고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녀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헤매다닌 끝에 대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에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을 먹게 되어버리는 탓이다.(76-77p)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물은 항상 간절함이 사라진 다음에야 나타난다고.(146p)
나에게 가장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세상의 사물 두 가지는 군사작전용 모형을 움직이는 모래상자와 군대의 전황 보고인데, 적어도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 두 가지 사물의 논리 사이에는 조건을 파악할 수 없는 드넓은 벌판이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우리의 감각으로 잡히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이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사를 뒤바꾼 주요 전투들이 바로 그런 요인들의 작용을 받았던 것이다. 사소한, 하지만 워털루에서 전사한 오만 군사와 말들의 생명과 비견될 정도로 비중 있는 요인들.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비중의 문제, 그것이다.
(...)
인간이 핸들을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 그런 의지만으로, 수많은 변수와 연관된 사물의 행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사실 참으로 허황된 것이다.(148-149p)
K 박사는 육체를 배제한 사랑의 이론을 단편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런 상에는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한 행복의 근원은 자연이지 이미 오래전에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우리의 육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다 어리석어지기 마련인데, 아예 눈을 감아버리거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지만, 욕망으로 흐려진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떠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성욕으로 그 어떤 때보다 더 대책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상상은 걷잡을 수가 없다.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을 요구하는 강박이 인간을 굴복시킨다. 이미 그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일단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놓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조차도,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150-151p)
그들은 우연히 몇몇 다른 이와 함께 있었는데, 그중 매우 부유하고 매우 우아하면서 젊은 한 러시아 여인이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한편으로는 극도의 좌절감으로 말미암아ㅡ우아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 역은 훨씬 드물게 성립하는 법이니까ㅡ카드를 꺼내어 탁자에 펼쳤던 것이다.(151-152p)
그런데 애초에 누구의 잘못 때문에 그가 이러한 엄청난 불행을 영원히 짊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잘못이라면 그것이 어떤 잘못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가 다름아닌 K 박사이므로, 나는 결코 항해를 끝낼 수 없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영원한 방랑이 의미하는 것이 사랑의 갈망에 대한 속죄라는 생각이 든다. K 박사는 그 자신이 펠리체에게 보낸 수많은 박쥐-편지에 썼듯이, 언제나 외양으로도 그리고 법적으로도 향유의 여지가 없는 그런 지점에서만 사랑의 불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157p)
쉰이 되던 해까지 건축용 함석 제조업체에서 일했으나 관절염으로 점점 몸이 굽는 바람에 조기 은퇴를 한 그는, 아내가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동안 온종일 집안의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한옆으로 일단 밀려난 사람에게 하루가, 시간이,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느리게 갈 수 있는지를, 하고 그는 말했다.(198p)
나는 매우 장황하면서도 군데군데 모순이 섞인 대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것을 금방 이해했다.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199p)
1511년, 페스트로 일백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1530년, 대형 화재로 일백 채의 집이 전소했다. 1569년, 큰 화재로 시장이 불타버렸다. 1605년, 대형 화재로 일백마흔 채의 건물이 잿더미가 되었다. 1633년, 스웨덴인들이 마을을 초토화했다. 1635년, 페스트로 주민 칠백 명이 사망했다. 1806년부터 1814년, 독립전쟁에서 W 출신 자원병 열아홉 명이 전사했다. 1816년부터 1817년, 수해로 흉년이 들었다. 1870년부터 1871년, 마을 청년 다섯 명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893년, 4월 16일 큰불이 나서 시장 거리 전체를 태웠다. 1914년부터 1918년, 고국을 위해 싸우다 이 지역의 아들 예순여덟 명이 전사했다. 1939년부터 1945년, 남자 일백스물다섯 명이 이차대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224-225p)
ㅡ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