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中, 한겨레출판
2019/2/8
저자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많은 부분이 바뀐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말이든.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97p)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99p)
돌아보면 살아오는 내내 나는 겁쟁이였다. 불편함, 괴로움, 고통들 앞에서 늘 도피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던 주변의 타자들 덕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120p)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144p)
경계의 시간 위에서 산다는 건 양자택일을(연속성이냐 불연속성이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물론 일상에 대한 자세는 달라지고 살아온 삶에 대한 정리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겠지만)아니면 그 삶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다른 삶을 살 것인가. 논리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당연한 건 후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삶은 오래된 습관이어서 시간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삶도 그렇게 단숨에 달라질 수는 없다. 새로운 나무를 심자면 오래된 습관의 나무를 캐어내고 토양을 비워야 하는데 질기고 깊은 과거의 뿌리를 캐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단호하게 선택한 사람도 그 결단과 기획을 즉각 실현할 수가 없다. 경계의 시간 위에서 우선 가능한 삶은 지난 삶의 연속성이냐 불연속성이냐가 아니라 또 다른 양자택일이다. 하나는 이전의 삶을 자세와 태도를 달리하면서 이어 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 토양을 비우는 작업, 오래된 습관의 뿌리를 캐어내는 우회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겨진 시간 안에 그 우회 작업이 마무리될지는 미지수다. 뿌리는 깊고 질겨서 쉽게 토양을 비워주지 않는데 작업의 시간은 하루하루 빠르게 줄어든다.(169-170p)
프루스트의 소설 공간은 둘이다. 하나는 생의 공간. 이 공간은 점점 더 수축하고 그 끝에 침대가 있다. 이 침대보다 더 작은 공간이 관이다. 또 하나의 공간은 추억의 공간. 이 공간은 생의 공간이 수축할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서 마침내 하나의 우주를 연다. 그것이 회상의 공간이고 소설의 공간이다.(184p)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252p)
ㅡ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