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中, 시공사

mediokrity 2019. 4. 3. 00:36

2019/4/2

 

번역, 번역, 번역. 진정 내 문해 능력의 부족함 탓인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가. 생각에 관한 생각도 구판으로 보고 있는데 이럴 때는 참 원문으로 볼 수 있는 영어 능력이 부럽다.

 

 

설령 아무 사고 없는 여행이라 해도, 자기 노선의 어딘가를 비행하는 조종사는 단순한 풍경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대지와 하늘의 빛깔, 바다 위로 남겨지는 바람의 흔적, 석양 무렵의 황금빛 구름, 조종사는 그것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자기 농지를 한 바퀴 돌며 수많은 징후로 봄이 오거나 냉해가 발생하거나 비가 올 것을 예측하는 농부와도 같이, 직업 조종사 역시 눈의 징후, 안개의 징후, 행복한 밤의 징후들을 해독해낸다. 처음에는 기계가 인간을 자연의 커다란 문제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더욱 더 혹독하게 그 문제들에 종속시키고 만다.(34-35p)

 

 

오랜 친구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한 그토록 많은 추억들, 함께 겪은 수많은 고된 시간들, 그토록 잦았던 다툼과 화해, 마음의 움직임, 그런 보물만큼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우정은 다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떡갈나무를 심어놓고 곧바로 그 그늘 아래 몸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헛된 일이다.

삶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 우리는 풍요로웠고 여러 해 동안 나무를 심었지만, 시간이 그 작업을 해체하고 나무를 베어내는 그런 시기가 온다. 동료들은 하나씩 우리에게서 자신의 그늘을 걷어낸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에는 늙어간다는 말 못할 회한이 서린다.(40-41p)

 

 

이별, 부재, 거리, 회귀의 관념들은 비록 그 단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동일한 현실을 담고 있지 않다. 오늘날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삶이 우리의 본성과 더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삶이 우리의 언어와 더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매번 발전할 때마다 우리는 습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습성들로부터 조금 더 멀리 밀려났고,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 자신들의 조국을 세우지 못한 진정한 이민자들이다.(58p)

 

 

멀리 떨어져 있음을 가늠하게 해주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정원 담벼락 하나가 중국 만리장성의 벽보다 더 많은 비밀을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사하라의 오아시스들이 모래 두께로 보호되는 것보다 어린 소녀의 영혼이 침묵에 의해 더 잘 보호되기도 한다.(77-78p)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수도원에 들어가 담을 쌓고서 우리가 모르는 규칙에 따라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티베트의 오지의 고독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그 어떤 비행기도 우리를 내려주지 못할 먼 곳에 있는 것이다.(88p)

 

 

그는 유대인 노점 앞을 어슬렁거렸고, 바다를 보았으며 이제 자신은 자유로우므로 어느 방향이든 마음대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유가 그에게는 씁쓸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무엇보다도 얼마만큼이나 그가 세상과의 연관성이 없는가를 깨닫게 했기 때문이었다.(121p)

 

 

우리가 강렬한 배고픔을 느끼듯이, 그는 사람들 틈에서의 한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고 사람들과 엮인 사람이 될 필요를 느꼈다. 아가디르의 무희들은 바르크 영감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왔던 것처럼 수월하게 그녀들과 작별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랍 카페의 종업원, 길거리의 행인들, 그들 모두 자유인으로서의 그를 존중했고, 그와 함께 평등하게 자신들의 햇빛을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필요하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웠지만, 무한히 자유로워 더 이상 대지 위에서 무게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걸을 때 거치적거리는 인간관계의 무게, 눈물, 작별, 비난, 기쁨, 사람이 어떤 몸짓을 할 대마다 아껴주거나 고통을 주게 되는 그 모든 것, 그를 다른 사람들과 묶어 무겁게 만드는 수많은 관계들이 없었다.(123p)

 

 

 

ㅡ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中,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