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도박사> 中,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9/4/27
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발췌본일 줄은 몰랐다. 전체의 약 20%를 발췌한 거라고 하니까 읽었다고 하기도 좀 그러네.
우선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끝내도록 하자. 그다음 날 할머니는 완전히 몽땅 다 날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거다. 한번 이 길로 들어서면 눈 덮인 산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것과 똑같이 가속도가 붙어 점점 더 빨리 그 길로 굴러떨어지게 된다.(132p)
맹세컨대 나는 폴리나가 측은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어제 내가 도박판에 손을 대던 그 순간, 돈다발을 긁어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부차적인 일처럼 뒤로 밀려났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다 하고 있지만, 그때는 나도 이 모든 사정을 명백하게 알지는 못했다. 내가 정말 노름꾼일까?(162-163p)
은화로 60휠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제로를 더 선호했다. 한 번에 5휠던씩 제로에 걸기 시작했다. 세 번째부터 갑자기 제로가 나오기 시작했다. 175휠던을 받아 쥐고는 좋아 죽는 줄 알았다. 10만 휠던을 땄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 즉시 100휠던을 빨강에 걸어 땄다. 200을 몽땅 빨강에 걸어 또 땄다. 400을 몽땅 검정에 걸어서 땄다. 800을 망크에 걸어 또 땄다. 처음 돈과 함께 계산을 해보니 1700휠던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 바로 그 순간이 되면 과거의 모든 실패를 깡그리 잊게 되는 것이다!(178-179p)
사실 인간이란 자기보다 잘난 친구가 자기 앞에서 비하되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로 이런 모욕감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우정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현명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래된 진리입니다.(182p)
러시아인들은 아름다움을 꽤 예민하게 구별할 수 있고, 또 미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아름다움과 개성의 독창성을 구별하려면 우리 러시아 여인들은 훨씬 더 많은 독립심과 자유를 가져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러시아의 어린 처녀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니 폴리나 양도ㅡ죄송합니다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ㅡ그 파렴치한 드 그리외 놈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당신의 친구가 되고, 당신에게 자기 마음을 다 열겠지만, 여전히 증오스런 파렴치한에게 추악하고 치사한 고리대금업자 드 그리외가 그녀의 가슴을 지배할 겁니다.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라도 아마 그는 그녀의 가슴속에 계속 그렇게 남아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드 그리외라는 작자가 언젠가 고상한 후작, 환멸을 느끼는 자유주의자, 영락한(마치 그렇기다라도 한듯) 사람의 후광을 띠고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의 가족과 경박한 장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모든 간계가 드러났지만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예전의 드 그리외를 내놓으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그녀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드 그리외에 대한 그녀의 미움이 커져 가면 갈수록, 이전의 드 그리외, 비록 그것이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전의 드 그리외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은 더욱 더 커져 가는 것입니다.(187-188p)
ㅡ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도박사> 中, 지식을 만드는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