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외소설

ㅡ 디나 루비나, <토요일에 눈이 내리면> 中, 이야기가있는집

mediokrity 2019. 5. 8. 13:35

2019/5/8

 

 

절대로, 말도 안 돼요! 이걸 직업으로 하라고요? 빅토르처럼 예술학자나 문학자가 되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는 절 존중하지 않는군요. 말재주가 좀 있고, 그림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예술과 함께하라고요? 오, 아녜요. 괜찮아요. 예술에 온전히 몰두한다는 건 뭔가 자신만의 것을 만들 때만 가능한 거라고요. 이해력이라는 건 나쁘지 않은 머리에 불과해요. 예술에 대한 이해라는 게 직업이 될 수 있나요? 게다가 예술학자라는 말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온다고요.(15p)

 

 

처음에 난 그렇게 집이 밀집해 있는데 왜 그녀가 커튼을 달지 않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슬픈 철골 침대와 유모차가 자세히 보이는데 말이야. 얼마 후에야 난 알게 되었어. 그녀는 그럴 여력이 없었던 거야. 매일 밤마다 배고픈 아이의 울음소리에 깨어 베개에서 무거운 머리를 겨우 떼내고, 온몸이 솜 같다가도 동시에 납 같고, 이건 몇 달 동안 매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일 잠 반복되는 거야. 그렇다면 창문을 통해 이웃들이 무엇을 보든 말든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지고, 본다 하더라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리는 거지.(25p)

 

 

맞아요, 당신은 떠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남지도 않았죠.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당신은 지난 오 년간 매일 절 처형했다고요. 전 당신이 떠나기만을 매일같이 기다렸어요. 처음엔 기대하는 구석도 있었죠. 당신이 그렇게도 아이를 사랑하니 언젠간 이해해서 저를, 그의 엄마를 용서해줄 것 같았거든요. 이해와 용서요.

매일 밤 전 마비된 심장을 안고 긴장한 채 누워 복도에 울려 퍼지는 당신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방으로 들어오면 전 당신에게 몸을 던지고, 당신의 무릎을 붙잡고 당신이 절 용서할 때까지 울부짖고, 또 울부짖으며, 기어 다니려고 기다렸다고요. 그러면 우리 사이는 다시 좋아질 테니까요.

아뇨! 당신의 발자국 소리는 변함없이 문 옆을 지나쳤고, 낮에 당신은 방으로 들어오기 전 노크를 했어요. 당신은 정중하게 노크했다고요. 오, 사랑하는 여보. 당신은 예의 바른 사람이에요. 오 년간 우리 아파트는 하숙집이었어요. 그래도 전 여전히 기다렸어요. 그리고 빅토르를 끊임없이 밀어냈죠. 전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 년 동안에는 혐오스러운 그를 밀어냈어요. 그리고 결국 포기했죠.(75p)

 

 

이 정류장에는 8번 트롤리 버스와 11번 트롤리 버스만이 섰다. 그녀는 11번 트롤리 버스를 기다렸고, 매번 그렇듯이 그녀가 11번 트롤리 버스를 기다릴 땐 8번 트롤리 버스만이 한두 대씩 왔고, 11번 트롤리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8번 트롤리 버스는 백 대나 다니고, 11번 트롤리 버스는 단 두 대만 운행되지만, 그마저도 운전수가 모두 술에 취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96p)

 

 

누군가 아주 멋진 말을 했죠.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모두를 지켜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말이에요.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다.’ 이 말이면 충분해요! 세상의 모든 실수나 잘못에 대한 완벽한 변명. 전 비난할 수 있는 재판관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님도 아니에요, 아빠. 저는요 아빠, 그저 무관심한 사람에 불과해요···.(209p)

 

 

꽤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의 남편은 내게 사고의 대상이었다. 포도를 선물한다는 사실 그 자체와 포도를 선물할 때 따라오는 그의 얼굴 표정 사이의 간극이 놀라웠다. 나는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생각했다. 뭔지 모를 힘으로 이끌기 위해 나에게 포도를 선물하는 악당인지, 아니면 바보 같은 바지와 셔츠를 입고 악한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침묵하며 포도를 건네는 면도하지 않은 시무룩한 얼굴을 한 선량한 사람인지···.(226p)

 

 

중요한 건 이 사건 이후 몇 년 내내, 어른이 된 후에도 내 악행에 대한 무서운 비밀을 안고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누군가가 강도를 당해 귀중품 삼천 루블어치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할 때면 나는 속으로 움찔하며 ‘나도 그랬는 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 일 분이라도 남의 집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내 안에서 비밀스러운 백작의 병이 깨어날까 봐 두려웠다.(238p)

 

 

예기치 못한 나의 콘서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마음에 큰 반전을 일으켰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이 갑자기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단 한 방울로 인간을 유혹해 곱사등으로 만들어 끌고 가려는 악의 바위를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동년배 빡빡머리 중 한 명이 복역을 마치고 위대한 힘으로 자신의 운명의 관성에 맞서 싸워 보통의 삶의 궤도로 탈출한다면, 나는 오래 전 그 예술의 한 방울이, 순진했던 나의 그 콘서트가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의 귀중한 노력에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흐뭇할 것이다.(351p)

 

 

ㅡ 디나 루비나, <토요일에 눈이 내리면> 中, 이야기가있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