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中, 두리반
2019/5/15
아무리 훌륭한 증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과학 이론을 진리라고 입증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엄밀히 이론을 검증한다고 해도 ‘이론은 그저 이론일 뿐’이다. 논리적으로는 언제든 새로운 데이터가 등장해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과학 이론이 정당성이 떨어진다거나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강력한 설명을 내놓더라도 그것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단지 증거를 기반으로 보증된 ‘믿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 논증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자신들도 진정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정말로 열린 공간이라면 자신들이 제시하는 대안 이론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이론이 완벽하게 증명되지 않은 이상 경쟁 이론은 언제나 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과학이 전제하는 인식론적 한계를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과학 이론이 증거를 기반으로 충분히 보증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사실 실증적인 방법론이 지닌 높은 표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과학 이론을 대체하겠다고 등장한 유사과학 이론에도 동일한 입증 책임을 요구해야만 한다. 설령 ‘논리적 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의 증거는 어디 있나요?”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처럼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때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은 늘 흐지부지 대답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작동하는 원리를 전혀 또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화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엄밀히 따지면 지구가 둥글다는 명제조차 증명할 수는 없다)이 과학의 심각한 결함이라고 착각하면서 대안 이론을 꺼내 들 준비를 한다.(38-39p)
더닝-크루거 효과는 저능한 사람이 자신의 저능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과 관련된 인지 편향이다(때때로 ‘너무 멍청해서 멍청한 줄도 모르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더닝-크루거 효과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77p)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최하위권 학생들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상위 88퍼센트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는데도 자신의 전반적인 논리력이 상위 32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확신했다.” 더닝-크루거 효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수행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79p)
집단은 개인을 능가한다. 신중하게 상호작용하는 집단은 수동적인 집단을 능가한다. 집단이 함께 문제를 검토하는 시간에 구성원들이 각자의 생각을 터놓고 얘기한다면 정답을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충분히 의심하며 다른 사람의 검토를 받을 때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상호작용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정치적 신념이 어떻든지 간에 본인이 원하는 ‘뉴스 사일로’속을 살아갈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남긴 댓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친구 삭제’를 하거나 ‘숨기기’기능을 이용하면 된다. 음모론에 한껏 심취하고 싶다면 종일 음모론을 소개해주는 방송 채널을 찾아보면 된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로만 주위를 가득 채우기가 이전 어느 때보다 쉬워진 것이다. 게다가 일단 사일로 속에 들어가고 나면 자신의 생각을 집단의 생각에 맞춰야 한다는 압력이 더욱 강해진다. (87p)
처음에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합리적인 시각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폭스뉴스와 MSNBC는 객관성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속하는 지지자들(결국 충성스러운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준다.(103p)
풍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풍자의 요점이기도 하다. 풍자는 일부러 현실을 비꼼으로써 현실 세계의 불합리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르다. 그런 풍자를 진짜라고 받아들인다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풍자의 목표는 남을 웃기는 것이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마시 본인도 이렇게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정치 풍자는 가까 뉴스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풍자 작가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벗어던짐으로써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고자 한다. 반면 가짜 뉴스 사이트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활용함으로써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는 내용을 퍼뜨리고자 한다.” 하지만 마시는 설령 둘의 의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똑같다고 주장한다.(106p)
언론이 객관성에 집착한 결과, 사실 문제를 전달할 때조차 모든 입장에 ‘균등한 시간’을 배정하고 양쪽 이야기 모두를 공평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만약 찬반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다면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문제를 전달하는 보도에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언론은 실제로는 믿을 만한 양쪽 입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주제를 다룰 때도 ‘동일 시간 배분’의 원칙을 따르느라 양쪽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게 되었다.
(...)
어떤 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이 해당 연구를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그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겁박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어버린 언론은 기후변화나 백신과 같은 과학적인 문제조차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110p)
‘균형 잡힌 보도’라는 개념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로 하여금 대중이 기후변화 문제를 완전히 오해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거론되는 문제는 정치적 편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학자들이 ‘정보 편향’이라고 부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정보 편향이란 기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뉴스를 보도하는 방식이 전달해야 할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 중립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가치에 고착하는 것이 어째서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일까?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한 언론이 열성 당원들(결국 언론을 진실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마저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극단적인 의견에도 지나친 신뢰성을 부여하는 ‘반대 담론’이 형성되었다. 균형 잡힌 보도 때문에 소수의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들이 내놓은 의견이 다수의 의견처럼 확장되어 보였다.(116-117p)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153p)
1. 뜬금없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라.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라거나 “신문에서 읽은 내용 그대로 말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예를 들자면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오바마가 트럼프를 도청했다고 주장하라.
2. 자신의 확신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말라. 어차피 증거는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3. 언론이 편향되어 있으니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라.
4.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언론에서 접한 내용이 정확한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니면 적어도 해당 문제에 논란이 많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5. 불확실함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자기 선입견에 들어맞는 내용만 믿으려고 하다가 점점 더 자신의 이념에 고착하고 확증 편향에 빠져들게 된다.
6. 이제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에 훌륭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가짜 뉴스는 1~5번 과정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7. 결국 사람들은 내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믿음은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주위에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존재하고 신뢰할만한 반대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믿음을 조종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때로는 반대 증거가 존재하더라도 쉬울 수 있다.
어차피 진실이 온갖 헛소리 밑에 파묻혀 있는데 굳이 진실을 검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정확히 이 지점이 탈진실 현상의 핵심이다. 진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상황 말이다.(155-156p)
박사 과정에 있는 순진한 미국 학생들은 아직도 진리는 지어내는 것이라는 점, 간섭이나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점, 우리는 늘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점, 우리는 특정한 입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배우고 있다. 바로 그 동일한 사회구성주위 논리를 사용해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이 우리가 힘들게 얻어낸 사실, 우리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실마저 파괴하려고 하는데도 말이다. 내가 과학학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한 것은 잘못이었을까?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만으로 용서가 될까? 좋든 싫든 지구온난화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왜 그냥 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190p)
철학은 진실과 사실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면에서 썩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이제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꽤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철학적 견해는 때때로 실제 현실에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저지른 일은 정말 악랄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들 때문에 진실과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가 남부끄럽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지적 풍조가 생겨났다. 이제 주위에서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아직도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부류가 있다던데 그쪽 분이신가 보네요.”(194-195p)
이 책을 통해 탈진실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탈진실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만주가 지적한 대로, 탈진실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칠 수는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게 중요한 문제는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개념을 옹호하면서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는 실용적인 조언 하나를 살펴보자.
(...)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거짓말에는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 그 말을 믿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충분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 이상 그러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 탈진실 시대에는 당파적인 힘이 개입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정보의 출처가 파편화되어 있어서 누구든 의도적 합리화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야 하는 이유는 거짓말쟁이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거짓말쟁이는 이미 자신의 검은 속내에 너무나 깊이 빠져서 갱생의 여지가 없을 수 있다. 그보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에 관객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거짓말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단지 무지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의도적 인식 회피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부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어떠한 사실이나 증거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거짓말을 마주하면 거짓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어떠한 거짓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거짓이 내는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진실’은 우리에게 맞서 싸울 힘을 준다. 당파적인 주장이 끝없이 이어지고 회의론이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205-207p)
특히 상대편이 어리석거나 완고하게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우, 정치색을 완전히 뺀 채로 사실 관계를 묻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우리 역시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또 있다.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적인 경향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우리 모두는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따라서 탈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외면하려고 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도 그러한 진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215p)
모든 뉴스는 그 새로움에 의해 차이로서 인식된 정보이며, 일차적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정보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정보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진실이냐, 사실이냐, 얼마나 정확하냐, 만약 정확하지 않다면 얼마나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조성된 것이냐 등등은 냉정히 말해서 2차적인 문제다.
그런 이유로, 가짜 뉴스는 정교한 외과적 시술을 통해 ‘병든 부위만 적출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완전히 악의적인 허위와 완벽한 선의의 진실 사이의 느슨하고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계속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탈진실 시대의 사회정치적·문화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특정 조합이기 때문이다.(254p)
ㅡ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中, 두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