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中, 현암사
2019/5/8
과연 그런 세상에서도 문화적 삶은 가능할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인간 이하의 포로 생활을 전전하던 소콜로프도 포로들의 과중한 노동량에 불평을 터뜨렸다가 결국 수용소 소장에게 불려간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두려움을 내비치진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소장은 그를 직접 사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독한 술 한 잔과 비계를 얹은 빵 한 조각을 안주로 건넨다.
하지만 ‘독일군의 승리를 위해’ 건배하라는 제안에 소콜로프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한다. 소장은 ‘너 자신의 죽음을 위해’ 마시라고 다시 제안하고 소콜로프는 단숨에 술을 들이켠다. 하지만 안주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첫 잔을 비운 후엔 안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장은 둘째 잔도 따라주지만, 소콜로프는 둘째 잔을 비운 후에도 안주에는 손대지 않았다. 둘째 잔 후에도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그는 셋째 잔을 비우고 나서야 빵 한 조각을 조금 베어 물뿐이었다. 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러시아인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켰다. 처음엔 씨근덕거리던 독일군 소장도 그런 소콜로프를 보고서는 용감한 군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살려준 건 물론이고 빵 한조각과 비곗덩어리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문화란 무엇인가? 소콜로프의 경우에 기대어 말한다면, 아무리 비참한 조건 아래에서도 처음 두 잔까지는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고집으로써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잔혹한 인간의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92-93p)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윤리적 행위는 반사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규칙보다는 습관을 따른다. 이것은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 판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구성적 인지주의’ 혹은 ‘구성주의’에 토대한다. 그것은 같은 인지과학 내에서도 ‘계산주의’와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했던 계산주의는 지식을 추상적 논리의 대응물로 간주한 반면에 구성주의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본다.
(...)
이렇듯 우리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때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반복적인 행동이 체화된 것이다.(115p)
ㅡ 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中,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