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위근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中, 시대의창

mediokrity 2019. 7. 20. 21:35

2019/7/20

 

 

어떤 불의가 개그의 소재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 그것이 불의라는 단단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할 때, 그의 발언을 통해 지금 이곳에 그런 합의 따위는 없다는 게 증명되는 것이다.(37p)

 

 

과학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마이클 셔머는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오류 중 하나로 ‘박해를 받는 쪽이 올바르다는 믿음’을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보고 웃었다.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를 보고도 웃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이 당신이 옳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

그가 상당수 여성 네티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셔머의 말을 빌리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자신의 도덕성이 훼손된 것에 대해 유아인이 느끼는 분함과 억울함이,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정성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며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 역시 되지 못한다.(42-43p)

 

 

혹자는 한국 남성들의 부족한 젠더 감수성을 놀리기보단 잘 설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설득이란 결국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과정을 동반한다. 그리고 한국 남성이라는 부족은 그것을 말할 때마다 불 같이 분노하며 귀를 닫기 일쑤였다. 아무리 여성학자들이 차분히 논거를 대며 군 가산점제 문제를 지적해도, ‘유명 여성학자가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군인은 집 지키는 개라고 했다더라’는 도시 괴담이 떠돌던 게 2000년대 초반이다. 여성을 증오하고 한 줌의 기득권이라도 빼앗기면 억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건, 다정한 설득이 아니라 그런 야만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어떻게든 인식시키는 것 아닐까.

자기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의 설득을 요구하는 건 언제나 권력을 쥔 쪽이다. 여기서 설득과 조롱의 이분법은 지워진다. 젠더 권력을 바탕으로 설득을 요구하는 쪽을 설득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그들의 권력을 상상의 영역에서부터라도 해체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설득될 때까지 성평등의 미래를 미루기보단, 그 미래는 이미 도래하고 있으며 여기에 올라타지 않는 너희가 도태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그렇게라도 말해주는 것이 그냥 도태될 원시 부족으로 놔두는 것보단 휴머니즘적이지 않을까.(66p)

 

 

하지만 이러한 웹툰 특유의 핍진성은 묘사된 현실에 대한 반성적 전유를 거치지 않을 때 자칫 세상의 통념들을 재생산하는 데 그치게 된다. 현실에 일진이 있으니 일진이 나오고, 현실에 폭력이 있으니 폭력이 나오며, 현실에 여성혐오가 있으니 여성혐오가 나온다. 많은 경우 핍진성과 재현의 윤리 사이에 반목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것을 동시대를 반영하는 작품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작품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창작에 있어 동시대에 대한 민감성이란, 단순히 지금 이곳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여러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까지 인식하는 능력이다. 즉 현실을 더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리얼리티란 결국 세상을 읽는 성실성에 달렸다.(94p)

 

 

“어제는 보스니아 문제를 이야기하고 오늘은 이민 법안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내일은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알제리 문제를 다루는 학자에게서 어떤 깊은 성찰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순기능은 자기 제한의 미덕을 갖추지 않는 순간 그대로 역기능이 되어버린다.(112p)

 

 

진화론과 창조과학 사이의 균형이 기만이고, 역사학과 환단고기 사이의 균형이 기만이며, 정치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균형이 기만인 것처럼 페미니즘 대 여성혐오 사이의 균형 역시 기만이다. 아무리 프로그램 안에서 여성 패널이 매섭게 반박한다 해도 이미 그 대결 구도를 허용하는 것 자체가 이 둘이 동등하게 다뤄져도 되는 관계인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145p)

 

 

많은 경우 언론의 자유를 그 자체로 하나의 보편적인 가치처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마치 자유라고 하는 인류의 기본권으로부터 연역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보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자유의 가치로 완전히 긍정된다면, 언론이 누군가의 사적 영역을 침범해 대중에게 알리는 것 역시 긍정될 것입니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특정 다수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관점으로도 모순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각각의 개인이 누리는 신체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처럼 생득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공익적 차원에서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가령 언론의 자유가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 그 침범을 통해 공공의 자유가 명백히 더 늘어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자의 알 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의 알 권리라는 것은 언론의 자유가 그러하듯, 보편적인 권리가 아닙니다. 알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알려지지 않을 권리 역시 있으며, 정보의 평등이 명백히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만 우리는 알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인은 알 권리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존해 보도를 정당화하는 대신, 독자가 알 필요가 있는 정보와 알 필요는 없지만 독자가 알기 원하는 정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디스패치>의 수많은 열애설 파파라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디스패치>를 비롯한 한국의 수많은 연예 매체는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닌, 독자가 원하고 욕망하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독자의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념의 혼용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팩트주의의 당위적 기반이 되는 언론의 자유와 독자의 알 권리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고, 실천적 맥락에서 공적 함의를 가질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151-152p)

 

 

시기상조라는 말은 언제나 실천적 반동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급작스럽지 않게 모두가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변화를 추구하자는 조심스러움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시기상조라는 말은 그 느린 변화의 첫 걸음조차 가로막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태반이란 점이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엔 반대하지만 그들이 대중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시기상조고, 부당한 차별로 인한 피해는 없어야 하지만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건 시기상조다. 이 얼마나 이상한 논리인가. 급격한 변화는 시기상조고 천천히 변화할 조건을 만드는 것도 시기상조고 그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시기상조라면, 이것은 그냥 멈춰있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마치 날아가는 화살은 멈춰있다는 제논의 역설처럼.

부당한 권력이 실재하는 곳에서, 모든 게 시기상조라고 하는 건 실천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부당한 권력을 그대로 두겠다는 뜻일 뿐이다.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유지하는 조건을 변화시키는 건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이들을, 차별주의자로 부르지 않아야 할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161p)

 

 

 

ㅡ 위근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中, 시대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