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이혁진, <사랑의 이해> 中, 민음사

mediokrity 2019. 8. 2. 03:14

2019/8/2

 

 

어느 쪽이든 상수는 참아야 했고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문제는 굴욕의 대가이지 굴욕 자체가 아니지 않아. 상수는 옅은 후회마저 느꼈다. 왜 그때 좀 더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당할 것을 모르지도 않았는데.(9p)

 

 

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점장이었다. 꼬투리 하나 없는데 그런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수영 자신이었다. 줄 듯 줄 듯할 수 있는 것은 지점장의 유력(有力) 때문이었고, 안 줄 것을 알면서도 줄 듯 줄 듯할 때마다 입을 뻥긋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무력(無力)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 그래서 더 아프고 굴욕적인 위압, 모멸감, 창피스러움, 수영은 화장실로 갔다.(83p)

 

 

사실 수영의 말이 맞았다. 망설였다.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말지. 수영이 텔러, 계약직 창구 직원이라는 것, 정확히는 모르지만 변두리 어느 대학교를 나온 듯한 것, 다 걸렸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두 가지가 상수 자신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상수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따낸 전리품이자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위력과 차별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93p)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

다들 개성, 특색, 자기만의 어떤 것이나 남들과는 다른, 하고 말들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장면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엇비슷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지라면 왜 굳이 험한 길을 택하거나 그런 길을 택한 척 가식을 떨어야 할까.(108-109p)

 

 

사람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종현은 차갑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서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는 게 사람들이에요. 자신과 다를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을수록 더 뻔뻔하게, 무자비하게.”(116-117p)

 

 

악착같이 붙들고 버텨서 차라리 뺏길지언정 순순히 내줘서는 안 된다.

제법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가는 꼴을 보면서 수영이 몸으로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차바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조차 한번 데려오면 돌이킬 수 없다. 종현과 함께 간다는 것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었고 종현이 쥔 것을 놓지 않게 한다는 것은 대신 수영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먹고 사고 쓰던 것을 한 등급씩 낮추고 한 푼 두 푼 쓰는데도 세 번 네 번씩 생각하는, 수영이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더는 어리숙하지조차 않은 채. 할 수 있을까?(127p)

 

 

상수는 내키지 않았다. 2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받는 것도, 나중에 그만한 선물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부담스러웠다.(145p)

 

 

종현은 아주 피곤한 날에도 종종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 집이 아니면 이 넓은 서울에서 갈 곳이 없었다. 이 침대가 아니면 몸을 누일 곳도 없었다. 물 위에 뜬 이파리 한 조각, 자신의 처지였다.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152p)

 

 

“남자란 간사하네. 착실하고 열심히 잘 살고 남보다 똑똑한 남자도 간사하지. 똑같거든, 멀쩡히 잘 살다가도 꼭 한 번씩 똥밭에 알몸으로 굴러 보고 싶단 말이지. 꼭지가 돼지 꼬리처럼 꼬불꼬불하게 돌아가도록 퍼마시고 지 아비, 어미도 몰라보고 싶어진다 이 말이야. 근데 또 말이지. 그렇게 퍼마시고 나면 그러는 거야. 내가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술은 쳐다도 안 본다. 술은 냄새도 맡기 싫어하고 몸에 좋고 순한 것만 먹고 마시지. 운동도 하고 등산도 다니면서 다시 멀쩡히 잘 살아. 알만 보고, 열심히 착실하게. 한동안은 말이야. 슬금슬금 이 향긋한 똥밭이 생각나기 전까지.”(173-174p)

 

 

결국 미경의 사촌오빠는 뒷조사를 한 것이고 미경의 아버지는 관계에 충실할 것을 조건으로 내 건 것이었다. 예상했고 가족의 새 일원을 맞아들이는 입장에서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진짜 가족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가족이란 무엇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 아무도 면접보고 시험해서 가족을 고를 자격은 없었다. 자신도 동물병원 유리 상자 안의 강아지가 아니었다.(180p)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못나고 잘난 게 아니야. 바닥이야. 디디고 선 바닥!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떨어지면 어디로 굴러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234-235p)

 

 

상수는 홧홧한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짜증만도 아니었다. 아팠다. 사랑한다면서, 늘 우리 애인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몰라줄까? 차분히 물어봐 주지조차 않을까? 서운하면서도 한편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 같아 입안이 썼다.(269p)

 

 

“절대로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넌 절대로 그럴 여자였고? 똑같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빈민처럼 똑같아. 기회, 외모, 돈, 능력, 시간 그 차이지 다른 거 없어. 우리 다 거지새끼들이야.”(321-322p)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지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325p)

 

 

다시 현실적인 걱정들이 엄습해왔다. 미경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헤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

후회가 된다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후회가 된다는 선배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점점 알 수 없기만 했다. 더욱더 무력해지기만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상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일수만은 없는 자신이 나약하고 남루해 견딜 수 없었다.(326p)

 

 

 

ㅡ 이혁진, <사랑의 이해>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