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서유미, <홀딩, 턴> 中, 위즈덤하우스
2019/8/15
마음에 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 한 권 더 읽어봐야지.
그는 사과하고 화해하면 그 싸움의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지 않는 타입이었다. 대신 싸움의 원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13p)
날이 선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는 감각이 무뎌지지만 화해하고 난 뒤에는 상대가 했던 말이 남긴 상처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 말과 함께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어떤 의미일까. 지원과 영진 모두 자신의 말끝에 묻은 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뱉은 말에서 나온 독이 자신의 상처 위에 번져나가는 것만 아파했다. 화해한 뒤에도,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순간에도 다정한 얼굴 뒤에 숨은 목소리가 문득 소리쳤다.(26p)
불행과 비극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편이 견디기 수월하다. 딸꾹질을 하다가 죽었다거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었다는 것보다 교통사고나 암 투병 끝에 죽었다는 얘기가 모두를 의심 없이 안전한 비극으로 이끈다.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47p)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긴다 싶으면 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는 자문이 생겼고 좀 더 알게 되면 그 앎이 초반에 생긴 호감을 지워나갔다. 어떤 앎은 무감을 호감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애당초 무감한 사람을 알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없었다.(85p)
부부싸움 앞에서 인간적인 장점은 대체로 무용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으로 꼽히던 것들이 하나의 두드러지는 단점을 이기지 못하거나 덩달아 단점으로 변해갔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한데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는 구질구질하게 길었다. 그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사연들을 하나로 묶어 사람들이 성격차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았다.(121-122p)
싸움이 반복되면서 지원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발을 닦지 않는 영진이 괘씸한 만큼 너그럽게 기다려주거나 쿨하게 넘겨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131-132p)
지원과 영진이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서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일시적으로 변하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바꿀 순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단점 때문에 화내거나 싸우는 것보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단점을 외면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을 자신도 없다. 둘 다 바꿀 자신이 없다.(144-145p)
제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할 수 없어 상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사소한 감정의 변화가 존재와 관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결정이 일시적인 감정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책임의 끈을 나누어 쥐려는 노력이 구차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151p)
요즘 지원은 매 순간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에 직면하고 빠져드는 게 괴로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세상에 둘뿐인 것 같은 마음이 될 때 사랑에 빠진다면, 둘이 함께 지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질 때 결혼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헤어지게 된다. 지원이 생각하는 이혼이란 그랬고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거나 삿대질하며 할퀴거나 물어뜯지 않아도, 돈과 시간을 들여 소송하지 않아도 이혼은 마음에서 진행된다. 조심스레 상대의 의견을 묻고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조율해나가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빛을 잃고 마모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점잖게 말하며 배려해도 서로에게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164-165p)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원은 결혼이 왜 생활이 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이 충만한 시기와 완전히 고갈된 것 같은 시기와 미움이 창궐하는 시기와 다른 욕망을 품은 채 바깥을 힐끔거리고 서성대다가 발길을 돌리는 시기까지 모두 합쳐 결혼생활이 되는 것이다.(216p)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229p)
그때 무리해서 집을 사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영진이 아이를 원했을 때 낳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잔소리쟁이가 아니었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는 게 지원이고 지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영진이 영진인 것처럼.(231p)
ㅡ 서유미, <홀딩, 턴> 中,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