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국내소설

ㅡ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中, 창비

mediokrity 2019. 9. 1. 02:12

2019/9/1

 

재치 있는 대사로 인해 밝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한편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나면 먹먹한 느낌이 든다. 좋다.

 

 

 

원래 집단의 속성이라는 게 웃겨서 한때 그 집단의 일부였다 튕겨져 나온 사람이 더 맛 좋은 제물이 되기 마련이었다.(13p)

 

 

철구 미친 새끼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19p)

 

 

재희의 말을 들은 의사는 피임과 정결한 삶의 중요성에 대해 20분도 넘게 일장 연설을 했다고 했다. 차트를 넘겨보며 주기적으로 방광염에 걸리는 것도 무분별한 성관계가 원인일 수 있다며 재희의 느슨한 순결 의식과 주색에 경도된 망나니 같은 삶 전반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며, 말했다.

ㅡ저같은 애도 있어야 선생님이 먹고살죠.(37p)

 

 

재희 역시 때때로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나는 재희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53p)

 

 

재희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누구보다 평범하지 않게 자라난 여자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회적 통념 같은 것을 코 푸는 휴지처럼 여기며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어쩌면·····(62p)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181p)

 

 

다른 술은 다 잘 마셔도 맥주만큼은 약한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인생에서 그래선 안 될 일 빼면 남는 게 없다. 술 취하면 쓸데없이 솔직해지며, 불필요하게 개가 되곤 하는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중 최악은 내 지난 연애사를 구구절절 읊어대며 신세한탄을 한 거였다.(199p)

 

 

뭐야, 계곡물이야? 뭔데 이렇게 투명해. 또 내가 복잡한 가정사에 약하다는 건 어떻게 알고 갑자기 훅 들어와. 왜 다 보여줘.(215-216p)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228p)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를 위해 주로 규호가 밥을 사주고는 했다. 빨리 성공해서 갚으라고 말하는 규호에게 언제나 큰소리로 당연하지,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둘 다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31p)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248-249p)

 

 

규호가 침대에 앉아 초밥을 집어 먹다 (평소처럼) 접시를 엎어, 내가 얼른 옷자락으로 간장을 닦는다.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매트리스에 얼룩이 남아버린다.(258p)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 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273p)

 

 

ㅡ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