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은희경, <빛의 과거> 中, 문학과지성사
2019/9/10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은희경의 작품 중 ‘태연한 인생’이 가장 좋았다. 그 생각은 이 책을 읽고도 변함이 없다.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미팅할 여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남자의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성인의 양심과 진실함에 더 가치를 두는 현명한 여성이어야 하며 그 현명함 안에는 남자들이란 타고나기를 여자의 외모를 따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움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찾는다는 거야? 남자 쪽은 전혀 아니면서?”(80-81p)
늘 자기 체격보다 작은 사이즈의 옷을 찾고 자기 나이보다 귀여워 보이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83p)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84p)
사실 사는 2학기 들어 학보사 일에 더욱 의욕을 잃었다. 내 능력 이상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는 건지,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한시바삐 그만두는 게 시간 낭비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247p)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277-278p)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319-320p)
정확한 관찰력은 그게 결여된 사람들이 흔히 냉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다.(329p)
열여덟 개의 식기와 마흔두 개의 접시를 사용하며 자신의 사교성에 만족감을 느꼈던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그와 같은 부류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권력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330p)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334p)
우리 둘 중 누군가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337p)
ㅡ 은희경, <빛의 과거> 中,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