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中, 창비

mediokrity 2019. 9. 11. 14:04

2019/9/10

 

soso.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7p)

 

 

사람들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상태에서도 부정의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의식하는 때는 기존에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상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변할 때이다. 만일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지고 있어 현 체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평등으로의 진보가 그냥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옳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34-35p)

 

 

범죄자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극단적인 악인을 상상한다.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자에 대한 과장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와 같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악랄하고 기괴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59-60p)

 

 

성별과 전공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산술적으로 8:2와 1:9라는 비율은 분명 수상하다. 이건 차별일까? 학생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대다수가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걸 누군가 성별을 이유로 못하게 한다면 차별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전공에 어떤 성별이 더 많은 건 딱히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말 그럴까?

여성의 입장에서 왜 특정 전공에 몰리는 ‘선택’을 하는지 생각해보자. 우선 흥미나 적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여성이 사람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더 소질이 있고 보람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면, 교육이나 간호 분야에 몰리는 현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에게 이런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배경에는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여러 나라를 비교해보면, 성별 고정 관념에 따라 진로 선택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성차별적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 여학생의 수학 성적이 더 낮았다. 여성이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문화적 고정관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능력을 저평가하고 수학 관련 진로 선택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임금이 남성에 비해 34.6퍼센트 적어, OECD 국가 중에 그 격차가 가장 크다. 교육수준을 고려해도 차이는 여전하다. 교육수준이 낮은 경우에 성별임금격차가 더욱 크지만, 대학 졸업 이상인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아도 동등한 교육수준을 가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임금이 28퍼센트 적었다.

그러니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선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 여성으로서 어떤 전공이 취업에 유리할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게 되어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이 좋을지 등의 선택은 이미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의 차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차별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직업시장이 성별에 따라 분리되면 여성에게 이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아지는 현상은 계속된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회 전반의 성차별 의식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많은 직업은 여성이 많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현상이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상황은 직관적으로도 부당한 차별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이 애초에 임금이 낮은 직종에 진출하는 상황은 다르다. 어떤 면에서 여성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노동시장으로 자발적으로 진입한 셈이 되었으니, 여성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70-74p)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인식하기 어렵다.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오즐렘 센소이와 로빈 디앤젤로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시야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더 크고 서로 교차하는 패턴보다는 한가지 상황, 예외, 일회성 증거에 집중하게끔 사회화되었다.”(78-79p)

 

 

비하성 표현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때로 사회는 단어를 교체한다. ‘장애자’나 ‘불구’를 ‘장애인’으로, (...) 이런 단어의 교체는 그 단어 안에 담긴 무의식적 편견과 낙인을 반성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어의 교체로 낙인이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인’ ‘다문화’ 등의 용어가 다시 낙인을 담은 비하성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꾸어도 그 대상을 비하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낙인을 지워지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어떤 소수자 집단은 낙인이 부착된 단어를 그들 스스로 전유reappropriation해버리기도 한다. 아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전약이다. 대표적인 단어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퀴어’다. 퀴어는 본래 ‘기괴한’이란 뜻으로,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이 단어를 전유해버렸다. ‘기괴하다’는 뜻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기괴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창적인 것이며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오히려 자랑스러운 특징이라고 선언해버렸다.(93-94p)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98-99p)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주요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치에 편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주요 고객들의 편견과 혐오감에 부응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거부하거나 분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여 차별을 금지시킨 것은 기업이라도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만든 것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하여 얻은 이익을 오롯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크든 작든 기업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책임이 있다.

(...)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때 불평등은 더욱 깊어진다.(126-127p)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이 잘 쓰이면 매우 의미 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142-143p)

 

 

만일 다수가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소수자 집단이 (유럽인권) 협약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협약에 담긴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소수자 집단의 종교의 자유나 표현과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협약이 요구하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저 이론에 지나지 않는 권리가 될 것이다.(145p)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148p)

 

 

세계적으로 이미 실험은 시작되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모든 젠더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나 젠더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외양을 가진 사람들,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서로 다른 성별인 경우 등 다양한 조건에서 화장실의 접근 가능성을 높였다.(179p)

 

 

 

ㅡ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