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그 외

ㅡ 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中, 현암사

mediokrity 2019. 10. 7. 11:48

2019/10/6

 

영화제 중간 대기 시간에 읽음. 무언가를 표현해야 할 때, ‘좋았다’와 ‘감동적이었다’와 같이 뭉뚱그리지 말고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또 크게 생각해보지 않고 사용하던 말이나 언어습관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

 

 

내가 아는 대부분의 무시는 거절에서 왔다. 누군가 내게 no라고 말했을 때, 닫힌 문 앞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못하고 ‘내가 어디서 어때서?’라고 자존심을 황급히 꺼내 들이밀게 되던 때가 바로 무시의 순간이었다. ‘쟤가 지금 나 무시하나?’라는 생각이, 감정이,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가 머릿속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반드시 내 안의 목소리만은 아닌, 밖에서 나를 평가하는 눈을 두려워하는 마음.

누군가의 언행이나 표정, 몸짓, 혹은 태도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거절당한 기분이 들게 하거나, 무안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던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 “너의 이런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어.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혹은 속으로라도 ‘아니야, 네가 알 필요는 없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지금 처리해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혹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네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게 내 문제는 아니야. 그건 나에 대한 네 태도의 문제고, 나는 이게 나를 괴롭히도록 두지 않을 거야’라고 정리할 수 있었더라면, 평온해 보이는 세상에서 나 혼자 괴로웠던 일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67-68p)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고 이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도, 더 생각해볼 만한 미진한 감정을 남긴다 해도 그걸 전부 “참 감동적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깃털처럼 상쾌하게 정리하는 인식의 습관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일까?

 

같은 사건을 목격해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각각 다를 수 있다. 하물며 어떻게 느끼는가는 당연히 모두 다를 것이다. 감동은 여러 감정을 아우르고 한데 묶어주면서 ‘여기에 뭔가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는 강력한 표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언어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감동했다고, 어떤 사건이 감동적이었다고, 그래서 참 ‘좋았다’고 느낄 때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사실 그 감정은 그냥 감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했어야 할 감사와 사랑의 말을 대강 암호화한 것일 수도 있고 스크린 앞에서 다들 울기에 따라 울었을 뿐 내가 뭘 느꼈는지 확신하지 못한 와중에 한 ‘아무 말’일 수도 있다.(77-78p)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106p)

 

 

억울이 얼마나 침습적인 감정이냐 하면, 우리는 이제 남이 억울한 것에도 민감해졌다. 특히 나보다 지위가 낮은 누군가가 나의 행동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으면 “뭐가 억울해?”라며 방어적으로 반격한다. 아동이 부정적인 감정을 호소하거나 항의하는 데 대한 일종의 벌이자 수동 공격으로서 이 ‘억울’은 효과적으로 굴절한다. 상대의 입을 막아버린다.(112p)

 

 

나는 어릴 때 “한은 한국인 고유의 정서이며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무엇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부정적인 감정의 거대한 덩어리를 귀신처럼 모시고 자랑스러워하면서 개개인이 건강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113p)

 

 

우리에게 이제 “뭘 잘했다고 울어”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내가 외부 세계와 주고받는 신호는 좀 더 분명해진다.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신호가 들어왔을 때 그 발화가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번역할 수 있다면 해당 상황에 재조립했을 때도 여전히 한국어처럼 잘 버티고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137p)

 

 

그 많은 한국어의 색상 이름은 대개는 정말 색상표에 올릴 수 있을 만한, 명료하게 구분되는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응당 이런 색이어야 하는 것이 무언가 다른 톤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사용할 뿐이지 레몬색과 황금색처럼 서로 동등하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

대상에 대한 감정을 담지 않고도 누리끼리한 가을 논밭, 누리끼리한 강아지 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현대 한국어에서 누리끼리가 지칭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란색’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산뜻하게 노란 톤의 봄옷을 차려 입고 나갔는데 누가 “노란색 옷을 입었구나!”라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한 옷을 입었네”라고 하면 기분이 상한다. 언어 안에 감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우리 언어는 색상 이름 안에도 주관적인 판단을 숨겨놓았다.(140-141p)

 

 

척추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체육 선생님은 가끔 “똑바로 해라, 똑바로”라며 으름장을 놓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똑바로’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온몸을 긴장시키고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고 확신해도 보는 사람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똑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똑바로 선 건지 확인하려는 시선이 나에게 와서 멎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댔다. 발을 모으고, 척추를 곧게 세우고, 팔은 가지런히 옆구리에 붙여 떨어뜨리고 가슴을 내밀고 고개는 치켜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것이 똑바로 서기의 정의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똑바로 선 자세의 정의는 지시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지시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라거나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번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똑바로 서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자세를 고칠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들은 정말 내가 바로 서기를 원하기는 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똑바로 서라는 지시는 나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금을 알리는 구호에 불과했다. 내 몸의 통제권이 나에게 없음을 확인시키는 한마디였다. 지금 이 얘기를 그때 그 어른들이 들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역시 지시를 내리는 사람조차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일 뿐이다. 6개월 전쯤 가르친 ‘차렷’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말과 동작의 일대일 대응은 진작에 물 건너간 얘기. 희미한 적대감과 번개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위계의 확인만이 남았다.(176-178p)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182p)

 

 

ㅡ 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中, 현암사